생소한 분야를 접할 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가 바로 입문서를 고르는 일이다. 특히 그 분야의 전문가가 국내에 희소할 경우, 몇 안되는 번역서 중에 기중 나은 것을 골라야할때의 곤혹스러움은 나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메소아메리카의 문명과 고고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다루는 책을 읽어보기로 한데는 저자가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이 분야의 전공자라는 것이 한 몫 했다. 안그래도 낯선 분야에 대해 읽느라 고생하는데, 어색한 번역투 때문에 추가로 골머리를 썩힐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이 책이 적절한 입문서였느냐?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고 싶다. 최소한 저자의 문체는 제법 자연스러운 편이다. 사진자료가 풍부하게 쓰인 점도 주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내용의 배치와 책의 구조가 지금 형태가 최선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각 문명을 구성하는 장의 도입부에 그 문명의 창조신화를 삽입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독파하기 어렵더라도 일단 그 문명의 핵심적인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선취한 다음 다른 주제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바로 왕사(혹은 지배자의 계보)를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특히 첫 장인 마야문명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해당 문명의 사회상에 대한 설명 없이 기계적으로 누가 왕이 되고 다음 왕은 누구고 하는 반복적인 서술을 보고 있자니 진이 빠졌다. 이렇게 계보를 읊는데 덜 치중하고 저자의 전공분야인 고고학에 바탕을 두고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생활상과 세계관을 설명했으면 독자의 흥미를 잡아두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편집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 들자면 53페이지의 '14년의 재위 후에 그가 죽자 6세의 어린 동생인 아흐깔-모-납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형의 재위 시절에 후계자를 의미하는 '어린 왕자', 즉 촉이라고 불렸다. 아흐깔은 형을 이어 35세에 왕위에 올라 23년을 다스렸다' 같은 문장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전 문장에서 6세에 왕위에 오른 이가 다음 문장에서는 35세에 왕위에 올랐다니? 안그래도 낯선 고유명사들로 가득 찬 문장을 신경이 곤두서 읽고있을 독자에게 이러한 오류는 더욱더 큰 혼란을 준다. 이밖에도 몇몇 모호하거나 오자임이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으나 일일이 이곳에 적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신들의 시간>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전공한 한국어 모어 화자라는 저자의 장점을 이해하기 힘든 난삽한 구성과 포커스, 아쉬운 편집 등으로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특히 위에 이 책의 풍부한 사진자료에 대해 칭찬했는데, 문제는 이런 이미지들이 페이지에 비해 너무 작게 배치되거나 하여 디테일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단 것이다. 안그래도 생소한 문명의 낯선 도상을 다루는데 이미지를 잘 알아볼 수가 없다면 독자로서는 흥미가 다소 꺾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설명했듯 이 책에는 나름의 장점들이 뚜렷하다. 메소아메리카의 문명사와 고고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한국인 독자들에게 전하는데 애쓴 정혜주 선생님의 건승을 빌고, 또 다른 책으로 만날 일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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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심보선의 팬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쯤 한겨레21에서 연재되던 '시 읽어주는 남자'라는 칼럼이 있었다. 나는 그 지면을 통해 심보선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자기애가 지나친 고등학생이었다. 그 시절에 트위터, 혹은 지금 형태의 페이스북 (그땐 페이스북에 좀처럼 긴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같은 게 있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지금도 그 기질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 못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엄청난 드라마퀸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 시절의 나를 회상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어느정도 과장해서 하는 이야기다. 나는 자의식과잉이라는 점 빼면 크게 표준에서 벗어나는 친구는 아니었다. 시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시절에 읽기 시작한 저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솔직히 나는 아직도 심보선을 좋아한다는 게 다소 길티플레져로 느껴지고, 민망하다. 

그런 설레면서도 찔리는 마음으로 그의 (아마도) 세번째 시집을 샀다. 

적잖이 놀랐다.  


(여기까지가 2017년 9월 9일의 내 감상이라고, 2018년 5월 9일에 적는다)


2018년 5월 9일에 이 글을 이어 쓰자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다고 일단 변명을 해둔다. 

심보선의 테마가 많이 변했다. 물론 전작들과의 연속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 주가 된 거시적 주제들, 이를테면 용산 참사, 등은 전작들에선 모호하고 주변적으로 제시되곤 했다. 이를테면 <인중을 긁적거리며>에서 그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방식을 보라. 아마 운동권이었을 그들은 그들의 행위 자체와는 분리된 채 서정시(혹은 연애시)의 일부로 등장한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의 스타일은 확실히 다르다. 시어도 훨씬 리얼리스틱해졌을 뿐 아니라 사건들은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그 외에 할 말이 많지는 않다. 나는 이 시집을 한번 밖에 읽지 않았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와 <눈앞에 없는 사람>을 각각 서른번씩은 족히 읽었을 나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시집을 덜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덜 집착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만약 심보선이 비슷한 시를 계속 쓰고 있었다면 나는 고등학생때의 자아를 버리듯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심보선을 부정했을 것이다. 

안심하고 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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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Today's carb was LEBANESE FLATBREAD. For the unrecorded preparatory session which took place on the 1st of October, we had SCONES (baked by I, the old lady) and CRACKERS with 5 dips


1. I was accused of being an elitist for underlining my book. I can't even remember how this accusation came about. I actually don't think I grasped the logic at that very time when this accusation was being made. It was such a baseless, impudent, unfair claim, and so this is THE FIRST THING I HAVE TO WRITE DOWN ABOUT THIS WHOLE BOOK CLUB. No joke.


2. Yasmine sobbed a lot talking about how the phrase 'gender equality' ends up having connotations like 'all lives matter.' *sobs We went on to discuss how we somewhat need to detach the notion of gender equality from the attempt to define feminism b/c: 1) such a definition does not cover feminist epistemological/philosophical projects of which primary aim is not necessarily to achieve equality, but to reinterpret all human intellectual legacies from women's perspective, 2) the whole baggage that follows when we talk about equality (i.e. "what about men's rights?!")


3. Our token white male was so busy this week that he could not possibly underline. Thankfully he somehow managed to do the reading. 


4. When we moved on to the chapter on the whole privilege discourse, I ended up pouring my personal dilemmas and proved to the rest of the book club that I MIGHT INDEED BE AN ELITIST. Oops. I'm fuckn filthy. I... I deserve to be publicly flogged. 


5. The token white male tried to offer some consolation saying, 'it's ok as long as you don't act on it.' However, Yasmine brought up the pedophile analogy ("oi that reminds me of the whole debate about pedophiles who don't act!") and the whole thing... just... just.. yeah I'm fuckn filthy.


6. Jenifer POINTED OUT that I was wearing WHITE clothes while I was VICIOUSLY criticising white supremacy. I, I....


Overall, it was a very enlightening and worthwhile experience. I was given numerous opportunities to articulate my self-criticism. I tried to reduce the burden by constantly pointing at the token white male but it did not work very well this time. I will give it a few more tries. 


*Next session we'll be covering pages 47-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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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게까지 colour-blind한 책이 모던클래식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 합당한가? 더욱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진보적 어젠다와 상상력이 작품의 존재의의와 분리될 수 없는 경우, 다른 종류의 소수자성과 고통에 대한 무신경함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다른 많은 반동적인 작품들이 사면 받는 것처럼, 그것의 예술성과 훌륭함에 기대어 '클래식'의 지위를 인정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얼마나 비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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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거의 반년이 지나 2017년 6월 19일에 이 포스팅을 쓴다. 갓 읽었을 때 더 할 말이 많았겠지만 어쨌든 계획해둔 포스팅을 미루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연말연초에 옌렌커의 소설을 ebook으로 몇 권 구입해 읽었다. 옌롄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한참 전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번역/출간 됐을 때였다. 그때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고 한참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지난 몇년간 픽션을 경시하는 버릇이 생긴터라 막상 구입하진 않았다. 그러다 작년 말,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책 읽기가 힘들어지겠다 싶어 + 심심해서 ebook을 좀 많이 구매했었다. 아무래도 ebook으로 읽을거면 논픽션보다는 빨리 읽히는 픽션이 낫겠다 싶어 소설책 위주로 구매했다.   


1. <나의 아버지, 20161223~20161224>


처음 읽은 것은 <나의 아버지>였다. 작품세계를 모르는데 무작정 픽션부터 읽는 것 보다는 수필을 먼저 보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그런 선택을 했다. 작가는 문혁 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 시절 일상 이야기가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특히 학교 얘기를 할 때, 작가의 주관적 경험과 정서가 우리 부모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아무리 둘 다 가난했어도 중국의 그것이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극단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개개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체험이 가난, 기회의 박탈, 권위주의 문화, 이런 요소들에서 온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한 듯. 그렇게 엽기적이기 까지 한 빈곤과 육체노동의 서사를 무심히 읽고 있다가 아버지의 죽음 전후의 정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을 굳이 이 포스팅에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1) 스포일러임 2) 안 적어도 계속 기억할거거든~~~~ 혹시나 궁금해 할 사람이 있다면, 그 부분은 작가의 윤리적 감수성에 어느정도 확신이 들게하는 통렬한 자기고백이었다고 묘사하겠습니다.


2. <사서, 20161226~20161227>


두번째로 읽은 것은 사서였다. 별 이유는 없고, 구할 수 있는 옌롄커의 ebook 중에 이게 비평적으로 더 후한 점수를 받는 것 같았다. 이 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굳이 <물처럼 단단하게>를 구매해서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와서 쓰려니 잘 생각이 안난다... 희미하게 남은 인상을 그러모아 이야기를 해보자면 일단 작가가 무척 스타일리스트라는 인상을 받았고, 또한 비극적 사건들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스타일은 아니되 무언가를 피하고 승화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지도 않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특화된 글쓰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스타일리스트라는 점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우선 이 소설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같은 사건에 대한 네 가지 책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설정이다. 그 네가지 책들은 순차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작가의 마음대로, 이야기가 이어지게끔 발췌/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수작질(?)은 움베르트 에코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는데, 에코야 뭐 중세연구가니까 그런 설정에 대한 욕망에 뚜렷한 목적과 동기가 있다고 해도 이 작가가 왜 이런 설정을 했는지는 상당히 불가사의하다. 단순히 네 명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라면 시점을 바꿔가면서 쓰면 되는만큼 굳이 네 가지 '기록'이어야 하는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서도, 나는 꽤 재밌게 봤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고있는 많은 고전이란것들이 결국 익명의 작가들의 공로가 짜깁기 된 그런 물건들 아니겠는가. 하나의 책이란 고랫적부터 결국 많은 책들의 총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서>가 하나의 책인 게 이상할 건 없다. 더 강렬한 동기도 뭔가 있을 거 같은데, 미욱한 독자라 이 이상은 모르겠음. 


'직설적인 묘사를 하지않되 피하지도 않는다'는 평가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충분히 잔혹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고 생각해도 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여러 한국소설이나 남미문학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 자체가 개인보다는 추상적 지위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들은 음악, 작가, 종교, 아이 등으로 불리운다) 그렇기도 하고, 일상적 묘사를 하다말고 갑자기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물론 이 책 자체가 지극히 비일상적인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긴하다). 다만 그렇다고 남미문학을 평가할때 관용어구처럼 쓰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닌 거 같고.. 원래 중국어가 모호해서 그런가? 하여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스타일이었고, 그러면서도 내 취향에 맞았다.


전반적으로 (나쁜 의미에서가 아닌!) '작가가 예술가구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3. <물처럼 단단하게, 20161230~20170102>


사서를 읽고 옌롄커에 대한 궁금증이 MAX가 되어 결국 이 책도 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서보다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초기작이라 그런지 대충 이 작가 스타일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겠다 싶어 나쁘진 않았다. 사실 내용이나 스타일이 별로라 싫었다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너무 우스꽝스럽게 극혐이라 읽는 내내 '이게뭐여.... 이게 개그여 리얼이여... 이게 뭐여...'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마지막의 반전은 꽤 볼만했고, 다만 초중반을 잘 넘겨야 재밌다. 제목이 왜 <물처럼 단단하게>인지는 모르겠다. 다분히 인위적으로 통속소설의 톤을 띄고 있다. 내 생각엔 아마 이 책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프로토타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목만 보고 한 생각이다, 왜냐면 중국공산당 선전물의 언어가 <물처럼>에 등장하는 묘사들에서 엄청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안읽어서 모르겠엉~~~~~




다음에 읽고 싶은건 <딩씨 마을의 꿈>과 <풍아송>인데 안타깝게도 이 둘은 ebook이 없다. 영어권에는 이외에도 <Lenin's Kisses>, 그리고 제법 최근작으로 보이는 <The Explosion Chronicles>과 <Marrow>가 번역되어 있는데 <Marrow>가 상당히 재밌어보이므로 언젠가는 구해서 읽을 듯. 




결론: 옌롄커좋앙ㅈㅐ밋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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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ebook을 조금 사서 읽는다. 계기는 사소했다. 하루는 장편만화가 너무 읽고 싶은데 뭘 읽어야할지 생각이 안났다. 그래서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ebook을 몇 권 샀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하루, 내가 어릴때 황석영의 <손님>을 보고 왜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의 ebook을 사서 훑어봤다.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고 보니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결국 당초의 목적인 내가 받은 충격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경험으로 인해 내 안의 리미터가 하나 해제되었다나는 ebook을 사기 시작했다.


나에겐 타블렛 PC라던가 ebook 리더 같은 기기가 없으므로 노트북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읽게 된다. 이게 뭔가 싶지만서도 pdf 파일로 무언가를 읽는 것 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내 경우 pdf 리더로 뭔가를 읽어야 하는 경우 텍스트가 아주 재밌지 않은 이상은 2, 3페이지 이상을 견디기가 힘든데 (그래서 보통 인쇄를 한다), 교보문고 SAM이건 크레마건 간에 ebook 전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경우엔 긴 글도 읽을만 했다. 


그러다 며칠 전 알라딘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는데, 페미니즘 도서 ebook을 얼마 이상 구매하면 에코백을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그 에코백이 괜찮아 보여서 ebook 몇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고 또 며칠 뒤 과제를 시작하기 전 스스로를 위무할 목적으로 장바구니의 책을 몇 권 샀다. 근데 ebook 포함 2만원 이상 결제하면 에코백을 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3만원 이상이었다. 결제는 이미 해버린 후였다. 호곡곡고구고고고곡! 빡치지만 어쨌든 책을 산 건 산 것이니 파일을 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SF는 내게 여러모로 생소한 장르다. 나는 언제나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했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표지가 너덜너덜 떨어질 때까지 읽어댔고, 도서관에서 아무 민속학 책이나 집어 곧잘 읽었으며,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동양의 고대사에 끌리곤 했다. 신화나 전설 따위를 읽고 있으면 인간의 상상력이라는게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보편성을 확인 받는 것 같아 안심도 됐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에 대한 기대'는 없는 편이다. 나에게 스포일러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건 거기서 거기고 중요한 건 전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에게서 몇 마디 정보를 얻는다고 그게 이야기를 겪는 나의 경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어쨌든 나는 특정한 형식의 이야기들이 다른 형식의 이야기들보다 매력적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각기 다른 정서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할 말이 있다). 


각설하고, 알라딘 이벤트라는 사소한 계기가 없었다면 SF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분위기를 타서 SF 도서를 몇 권 더 주문하기까지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서사라는 것에 대해 큰 기대가 없고 또한 작중 묘사가 엄청 강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장르적 쾌감이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애초에 내가 장르적 쾌감이라는 것을 얻기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이런 스스로의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갖고있는 어떤 태도에 꽤 매력을 느꼈다. 물질적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묘사, 휴머니즘 같은 것들. 소설이건 영화건 뭐건 간에, 현대의 매체들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과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적 수준이 세계에 대한 다층적인 묘사를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나갈 수 있게 하는 데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예를 들어보자. 단순히 옛날 이야기에서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이 '지상낙원', '천국', '내세', 정도로 등장했다면 작중 등장하는 두 개의 다른 세상(둘 다 나름대로 인류가 열망해온 '지상낙원'들이라고 볼 수 있는)은 모두 복잡한 결을 갖고 있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에 설득력이 있었다. 


더욱 맘에 드는 점을 꼽자면 단순히 (너무나 거장인) 작가가 입체적인 세상을 직조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국 작가가 어떤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건 문학 속에서건 너무 비대하고 복잡해진 이 시대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도 선택은 틀릴 수 있고 나의 선의와 상관 없이 책임은 돌아온다. 선택 그 자체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꼭 해야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선택'은 멍청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혹은 작가는, 선택을 한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물리학자인 주인공의 이론이 아주 모호한 형태로만 제시되는 것에 대해 다소 답답함을 느꼈는데 어차피 과학적으로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라 이 부분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수포자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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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는 친절함이 과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불친절한 책이었다. 화자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은 무척 쉽다. 매우 통속적이다.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역사적 맥락이 어떤 형태로 제시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책은 불친절하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들을 읽으며 칠레 현대사의 큰 줄기를 대강 배우는 일은 가능하지만 마스트레타의 소설들을 읽으며 멕시코 현대사를 배우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물론 어디까지나 스타일이 그렇다는거지 그럼으로 인해서 이 소설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배경지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꽤 재밌게 읽었다. 


중남미문학에 통달은 커녕 특별한 애호도 없다. 사실 문학에 대한 애호 자체가 그다지 없다. 몇년전부터 소설을 읽을때마다 내가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러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내게 소설에 대한 취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동유럽 출신이거나 중남미 출신이면 어느정도 신뢰를 하고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고나면 대체로 만족하곤 한다.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PTSD를 앓게 된 사람들이 쓴 것만 같은 소설들이 좋다. 그렇지 않은 경우 대체로 시시하다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남미소설에 대한 내 기대에 별로 어긋나지 않았다. 


내용에 대해 쓰고싶지는 않다. 사실 이 소설엔 그다지 내용이랄 것도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부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 속의 이야기와 닮은 부분들이 있다. 그러고보면 내가 중남미소설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경로가 내 주변의 그것들과 비슷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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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야망

Buying 2016. 9. 2. 23:40





이씨조선의 엘리트들을 경멸하면서도 동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들의 책이나 문방구, 서재에 대한 집착을 볼때 특히 그러하다. 이상적인 책장 그림을 그려놓고 감상하면서 하악하악하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리고 후세인인 나는 그 이미지들을 모으면서 하악하악하고 있고...


지금 나의 가장 시급한 목표는 '졸업 후 괜찮은 직장에 취직'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소망이다. 그러나 가장 하고 싶은게 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약간 달라진다. 그것들은 기이하게도 책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1. 서재들을 합친다.


사주를 믿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의 사주에는 역마살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우스운 것은, 내가 지독히도 여행과 객지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정착이 없었다. 어릴때 유학을 가고, 유학을 간 다음에는 셋집을 전전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린 객기에 대학을 타지로 진학했다. 나는 1년만에 그 결정을 후회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처음 유학길에 올라 멜번에 갈 때 나는 엄청난 양의 책을 등짐으로 지고 비행기에 탔다. 내 백팩에는 시공사판 바람의나라가 1권부터 21권까지 빽빽히 들어차있었다. 가방이 꽤 넉넉한 등산가방이었어서, 꽤 많은 양의 만화책을 더 집어넣을 수 있었다. 부치는 짐은 무거울수록 돈이 나갔기 때문에 엄마의 꾸지람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가능한 한 책들을 내가 직접 들고가려고 애썼다. 그때 내가 갖고간 만화책들의 양이 굉장했다. 킹오브밴디트징, 선녀강림, 파라다이스키스... 뭐 이런 중학교 1학년생이 좋아할만한 만화들이었다. 


가져간 책의 권수로는 만화책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지만 그것들만 갖고 비행기에 탄 것은 아니었다. '칼의 노래'나 '신화의 힘'도 그때의 리스트에 들어있었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도 있었다. 웃긴 것은 다 이미 한번은 완독했던 책들만을 골라 가져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호주에서 나는 그 책들을 정말 지겹도록 재독하고 재독했다. '칼의노래'는 이제 책 표지가 너덜너덜하니 알만하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나는 한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계속 내가 읽고싶은 책들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이 책들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대표적으로 진중권의 책들을 그런식으로 접했다. 그외에도 언니가 자신이 재밌게 읽은 책들을 종종 끼워서 보내주었다. 그런식으로 언니가 골라서 보내준 책들은 <김약국의 딸들>, <삶의 한가운데> 등이 있다. 몇 권 더 있지만 저렇게 두 권이 내게 각별했다.


영어로 독서하는 습관을 들인 것은 우습게도 10학년이나 되어서였다. 나는 그 전에는 호주에 적응할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림 많이 그리고 인터넷만 디립다 했다. 9학년때 에세이라이팅 과외를 하던 선생님이 나를 좀 예뻐했다. 그때 첫 숙제로 무슨 대체역사물 소설에 네 해석으로 주석을 달아오라고 시켰는데, 엄청난 지적 허세로 가득찬 결과물을 내놓았다. 의외로 과외선생님은 그 과제를 굉장히 맘에 들어했다. 영어가 어눌한 중3짜리 꼬마가 '수태고지'니 뭐니 하는 고급어휘들을 사전에서 열심히 찾아서 뭔가를 써온게 기특했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영어와 공부에 흥미를 붙였다. 내가 칭찬에 좀 약하다... 그때부터는 영어로 쓰인 책들도 모으기 시작했다. 헌책방에 드나드는 취미도 생겼다. 그렇게 멜번에 점점 '내 책장'이라고 부를만한 게 생겨났다. 


대입시험이 끝나고 나는 캔버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혼자 살아보고 싶은 게 가장 큰 동기였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캔버라는 공부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드니, 브리즈번 등을 제치고 부러 캔버라에 있는 대학을 골랐다. 몇 년의 대학생활 후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어쨌든 캔버라에도 내 책장이라고 부를만한 게 생겼다. 법서들의 부피가 너무 커서 조그만 2단 책장에는 언제나 책들이 겹겹이, 가로세로 수납되어있다. 그래도 공간이 모자라서 얼마전에는 지난 교과서들을 조금 팔았다. 그래서 캔버라에서는 어지간하면 얇은 페이퍼백만을 구입하는데도 늘 공간이 모자라 책상이나 소파 같은 곳에 책을 쌓아두기 일쑤다. 


2012년에 휴학하고 서울에 갔다. 그때 내가 뭔가 했다고 할만한 일은 딱 하나다. 책장정리. 옛날부터 한번 뒤엎어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시작 자체는 꽤 발작적으로 했다. 어느날 밤에 펜으로 종이에 칸을 슥슥 그리고 분야별로 책을 나눌 생각을 했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밤에 책을 다 뽑아내고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았을 때 몽땅 버렸다. 약간의 배경설명을 하자면, 나의 서울집은 방이 네 칸인데 언니가 시집간 이후로는 아버지 혼자서 그곳에 기거한다.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나나 동생이 몇달씩 한국에 와있을 때도 있기 때문에 집을 줄여 이사 가기도 여의치 않다. 유학 가기 전 어머니가 쓰던 방을 '서재'로 부르는데 이 방에는 주로 엄마의 책들과 언니의 책들이 수납되어있다. 그래서 벽면 전체를 거의 차지하는 큰 책장이 두 개가 있다. 한 책장에는 젠더스터디를 공부한 엄마의 책들이, 한 책장에는 정외과를 나온 언니의 책들이 있다. 내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이미 분야별로 분류가 대충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쪽 서재는 대충 놔뒀다. 그리고 '작은 서재'가 있다. 이곳은 내가 유학 가기 전 쓰던 방인데 너무 작아서 방으로써의 기능은 정말 최소한만이 가능했다. 2010년 말 언니가 시집간 후 나는 언니 방을 침실로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방을 정말 개인서재처럼 쓸 수 있게 되었다. 2012년의 여름에 나는 이 방의 책장을 말그대로 갈아엎었다. 여기저기서 물려받은 아동문고나 괴서들, 어릴때 철모르고 산 잡서들을 죄다 갖다버렸다. 버릴 게 너무 많아서 몇 번을 왔다갔다 했다. 경비아저씨가 이 꼴을 보고 어떻게 책을 그렇게 버리냐며 말렸다. 신기하게도 책들을 재활용쓰레기장에 버리는 족족 누가 가져갔다. 경비아저씨는 결국 나의 소행을 막 퇴근한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대체 왜? 아버지는 책을 왜 버리냐며 조카에게라도 갖다줘야한다고 내가 마지막으로 갖다버린 책더미를 또 한 수레 싣고왔다. 아버지는 그 책들을 언니 집에 갖다 줬지만 먼지투성이인 그 잡서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이때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책을 향한 물신적 집착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책은 책이라는 이유로 버릴 수 없다는 뭐 그런 의식. 


필요 없는 책들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전에 없이 가벼워졌다. 책장들을 닦고 내가 계획한대로 분류해서 다시 꽂았다. 막상 책들을 꽂기 시작하니 책들의 크기라던가 키라던가 이런것들을 맞추는데 꽤 신경을 쓰게 됐다. 이 과정이 며칠 걸렸다. 정리를 끝내고 나니 책의 수가 많지 않았다. 워낙 많이 갖다버리기도 했고, 온전히 '내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게 서울에는 몇 권 없었다. 그야 서울에 살던 시절 줏어 읽던 책들은 주로 언니나 엄마의 책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틈틈이 서울에 올때마다 내 돈으로 사본 게 몇 권 있긴 해서 대충 분야별로 칸을 나누니 아예 텅 빈 칸은 없었다. 2016년 1월 마지막으로 서재를 봤을 땐 만화책이 너무 많은 칸을 차지하고 있어서 또 이게 약간 처치 곤란이다. 이 작은 서재에서 밤에 우드위크 초를 켜놓고 책을 보고 있으면 아주 운치가 있었다. 조금 추운 방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금 내가 가장 강렬히 소망하는 일은 나의 이 세 방에 있는 책들을 하나의 공간에 합칠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서울에서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그 책은 멜번에 있고, 캔버라에서 예전에 읽은 책을 과제할때 인용하고 싶은데 그 책이 서울에 있고, 만화책의 어떤 권은 멜번에 있고 어떤 권은 서울에 있고, 정말 미칠 노릇이다. 이 소망은 내가 삶의 터전이라고 부를만한 하나의 장소가 생길때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로또가 터지거나... 취직을 해야... 가능하다...

 


  

2. 조카에게 책을 사줘요 


내 조카는 여섯살이다. 나는 이녀석을 깨나 좋아하고 이녀석도 나를 깨나 좋아한다. 요즘 애들은 한글 깨치는 게 빨라서 이 나이때 벌써 글을 읽고 쓰는 애들도 있지만 이 녀석은 아직 자기 이름 석자를 겨우 쓰는 수준이다. 나는 조카에겐 암말 안하지만, 어쨌든 그가 글을 꽤 유창한 수준으로 읽게 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조카에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질을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사다 바치고 싶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채지충의 중국고전 전집도. 근데 이건 요즘 파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읽은 학습만화 전집들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조카녀석을 역덕후로 만들고 싶은 것일까. 어쨌든 나도 빨리 십만원 이십만원 하는 전질들을 턱턱 사줄 수 있게 취직을 해야되고, 조카녀석도 그것들을 읽어야하니 어서 한글을 깨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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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구체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리고 있는 상이 있었다. 미시사, 피플즈 히스토리 이런 영역에서 관심 있는 키워드를 몇 개 뽑아서 나의 감상이나 발췌문 같은 것을 정리한 다음 태그해놓고 아카이브를 해놓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뭔가 해놓으면 몇 년 안에 이 분야에서 괜찮은 딜레탕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욕심이 있었다. '내가 읽는 책들에 대해 전부 기록한다'는 목적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게 메인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야심이 흐지부지 되면서 이 공간도 메모 몇 개와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 블로그로 뭘 해야될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심심할때 들여다보긴 한다. 오늘도 공부하기 싫어서 이곳에서 소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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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책 1

Chitchat 2016. 3. 14. 10:54


어린 시절 나는 흔히 책벌레로 일컬어졌다. 돌이켜보면 내가 뭐 굉장한 지적 호기심이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그냥 엄마랑 언니가 둘 다 책을 많이 읽었고, 또 집에 책이 많이 굴러다녔고, 책을 읽으면 시간이 잘 가고 또 선정적인 뭐 그런것도 많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 헿헤... 여러분 할아버지 취향의 역사소설(이를테면 '수양대군과 한명회' '소설 명성황후' '장희빈' 등)에는 꼭 권마다 야한 장면이 하나씩은 들어간답니다 헿헤... 중전, 합궁합시다!




사건은 중3 여름방학때 일어났다. 당시 나는 비자 문제로 잠깐 한국에 들어와 들짐승 산짐승 뛰노는 내 고향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우리 동네가 낳은 천재 중 하나인 한 이웃집 소년과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는 경장한 어학능력의 소유자로 그 시절에 이미 수많은 영어 원서를 독파하였으며 막 쇼팽을 막 치고 어 음 하여튼 대단하신 분이었다... 근데 그분이 천재인건 뭐 하루이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들에 별다른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던 와중 어느날 그분의 책장에 꽂힌 'Wealth of Nations'를 발견했다. 그렇다, 그거슨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다. 그때 나는 약간 패배감을 느꼈다. 저.. 저 녀석이 책벌레인 나보다 국부론을 먼저 읽다니.. 인정할 수 없다능!! 뭐 이런..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쓸데없는 생각인데.. 국부론이 뭐라고... 사춘기의 나는 하여튼 그랬다.




어쨌든 나는 그분과 친했고 그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퓨어 패배감이라기보다는 경이 + 패배감에 가까웠으므로 나는 집에 와서 그날의 발견에 대해 별다른 네거티브함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있잖아, 걔는 벌써 국부론을 읽더라. 영어 원서로. 대단하지?' 뭐 이런 투로 부모님 앞에서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내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디씨였다면 'ㅋ 지금 기분이 어때? 막 부들부들 떨리고 그래?ㅋ' 이렇게 놀리기 좋은 그런 리액션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책벌레인 자신의 도-터보다 더 대단한 책을 읽는 또래아이가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역시... 코리안 람보...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아버지의 행보는 실로 코리안 람보다웠다. 퇴근 후 아버지는 나를 불러 책을 한 권 사왔다며 손에 쥐어주었다. 사실 아버지가 나를 부른 바로 그 시점에서 아버지의 성미를 익히 아는 난 분명 아버지가 국부론을 사왔기 때문에 굳이 나를 찾는다는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헉~~~~~ 띠-용~~~~~!













아버지가 사온것은 '군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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