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사를 해서 너무 정신이 없었다. 6월 8일에 올린 <조선의 퀴어> 독후감에 이사를 한지 얼마 안됐다고 썼는데, 6개월만에 또 이사를 한것이다. 남의 집에 산다는 게 뭐 좀 그렇다. 그나마 이번 집은 1년 계약이니 좀 낫길 바란다... 슬픈 사회초년생의 삶... 사야되는 것은 너무 많고 돈은 없다... 그나마 인터넷은 (이미 이사한지 3주가 넘게 지난 시점에서) 신청해놨으므로 다음주부터는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여러모로 바빴다고 해서 포스팅이 없던 세 달 내내 독서를 하지 않은 건 아닌데, 진득하게 앉아서 뭘 곱씹고 쓰고 할 시간은 없었다. 독서야 틈틈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뭘 한 문단이라도 쓰는 건 적지 않은 단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최근의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너무 귀했고, 그런 시간이 있다면 보통 만화일기를 그린다던가 낙서를 하는데 썼다. 뭔가를 그리는 건 어쨌든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나의 정신건강을 고려한다면 그쪽이 우선순위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상한쪽으로 정리벽이 있는 나의 성격상 독후감을 쓰겠다고 블로그를 만들어놓고 독후감을 안쓰는 것도 모종의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커피테이블에 그간 읽은 책들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독후감을 써보도록 한다 (아, 도대체 나는 어쩌다 이런 정신병자가 된 것일까?).

 

로버트 단턴의 책은 이번에 두번째로 읽은 것이다. 2012년 혹은 2013년도쯤에 <책과 혁명>을 읽다가 말았고, 그외에는 사학과 수업을 기웃기웃하며 이것저것 발췌독할 기회가 있었다. 우습게도 제일 중요한 저작 취급 받는 <고양이 대학살>은 읽지 않았다. 

 

프랑스혁명기를 다룬 책이지만 프랑스 혁명을 다룬 다른 책들보다는 과거에 포스팅한 <루됭의 마귀들림>이 더 자주 떠올랐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콩도르세가 루됭 사건을 언급하는 인용문이 등장하기도 해서, 루됭 사건이 프랑스사에서는 꽤 임팩트 있는 에피소드로 남았다는 사실을 부차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와 루됭 사건 사이에는 1세기 하고도 반이 넘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어쨌든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과 인간 정신이 표현되는 역사적 양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책 사이에는 프랑스사라는 큰 틀을 넘어서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 작은 책에는 한 가지 커다란 목적이 있다. 바로 혁명 전야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프랑스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검토하는 일이다. 곧 프랑스혁명으로 관심의 초점에서 밀려나기 전 프랑스인들이 보던 대로 그 세계를 보려는 것이다. (p 19)"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의 모습은 <루됭의 마귀들림>의 그것보다는 익숙할 수 밖에 없다. 메스머주의는 단순하게 말해 18세기 후반 유럽 사회에서 성행한 일종의 사이비 과학이다. 메스머주의는 어쨌든 당대에 유행한 과학적/계몽주의적 사고방식과 언어적 틀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사회구성원 일반의 존중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거친 비유이지만 한국인이라면 한의학을 떠올리면 되고, 서구적 예로는 homeopathy나 chiropractic 따위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메스머주의의 열렬한 추종자들의 리스트에 라파예트니 데물랭이니 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이름이 올라가있다는 것이 처음엔 황당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사실 잠시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은 현대에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범속함에도 불구하고, 왜 메스머주의는 한때 성공한 사이비 과학 이상의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첫번째로, 동어반복적이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이야기한대로 '프랑스인들이 보던 대로 그 세계를 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 시기에 유행한 모든 것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썼지만) 기만적인 이유인데, 사실 진지한 사람이라면 1 대 1로 무언가를 복원하고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메스머주의가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의 성공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건/현상에 관해 시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그 사건은 물론 대혁명이다):

 

"그 당시 프랑스인들은 메스머주의가 자연에 대해, 자연의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에 대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는 힘들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 그들이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사고방식 중에서 메스머주의는 중요한 한 항목이 되었다. 이런 유산 속에서 메스머주의의 위치가 결코 인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세계관의 원천이 된 것들 가운데 불순하고 유사과학적인 것들에 대해 한층 더 까다로웠던 이후 세대들이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동안 메스머가 누린 인상적인 지위를 애써 잊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pp 20-21)"

 

아이러니컬하게도 메스머주의는 그것이 사이비과학으로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속성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의 시선을 끈다. 메스머주의의 주창자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는 빈 의과대학 출신의 의학박사로서, 일단 관련 분야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력 정도는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루됭의 마귀들림>에 나타나는 의사들도 그렇지만, 19세기 중반 이전의 의사들이 과연 그들이 갖고있는 권위에 비례해 믿을만한 존재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자). 그는  <동물자기론>이라는 이론을 주창한 뒤 프랑스 곳곳에 이 이론을 응용한 치료소를 열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이론과 행보는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지만 주류의학계의 환영은 얻지 못한다. 당대의 많은 개혁적 지식인들은 이러한 메스머주의와 주류의학계의 불화를 주류의학계의 이해타산과 이기심에서 연원한 것으로 해석했다. 당대에 만연했던 이러한 이해를 통해 메스머주의는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 독자에게 당시 프랑스 사회의 광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NL... 개량한복, 기치료, 수지침, 이런 키워드로 환원되고 만다....

 

어쨌든 진보들은 이래서 안된다 진보는 멍청이들이다 이런 결론을 내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 것은 아니고 (내가 진보임), 그냥 뭐 세상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메스머주의라는 사이비과학의 일종이 유행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용적으로 그것이 어떠했던 간에 그것이 이성적이고 계몽적인 외피를 쓰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 처럼 당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메스머주의의 옹호자들은 메스머주의의 이론적 틀과 조직을 사용해 혁명에 참여했고 (이 과정은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있음), 더욱 철저하게 근대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세계를 완성하는데 있어 기여를 했다. 그러나 훗날 현대인들이 재구성한 역사에서 그들은 '유사과학적'이고 '불순'하기 때문에 종종 탈락되고야 만다. 물론 이런 탈락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단순히 메스머주의라는 이론 자체가 발전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유의미한 정보값과 맥락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스머주의는 당대인들의 지적 세계의 강력한 표현 -특히 메스머주의를 향한 추종이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사건을 가능케 한 에너지와 겹친다는 점에서- 으로써 진지한 검토와 평가를 필요로 한다. 

 

세상이 이렇게 모순적입니다 여러분! 물론 뭐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좀 오바고 사실 메스머주의 자체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었을수도 있지만, 어쨌든 저자가 '18세기 사람들이 루소나 몽테스키외를 읽고 혁명을 한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야설을 엄청 봐서 혁명을 했네요..' 이걸 막 표로 보여주고 이래갖고 유명해진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이거 중요했다고 하면 중요했겠지 뭐... 여튼 서로 너무 미워하고 살지 맙시다! 급마무리 is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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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됭의 마귀들림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잡담과 서론

2012년 중순, 건강 문제로 휴학을 한 뒤 약 반년을 서울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꽤 많은 책을 샀고 또 읽었다. 이 책 역시 그 시기에 구매한 책 중 하나이다. 막상 한국에서 지내던 당시에는 이 책을 집어들지 않다가 멜버른에 돌아온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거의 완독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수녀원에서 일어난 마귀들림 사건이라는 서사의 특이성 자체에 집중하며 읽었던지라,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중간의 몇 챕터를 생략하고 마지막장을 읽고 말았다. 별 거 없었다. 이해당사자들의 동기고 전말이 아주 시시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저술의도가 사건 자체의 선정성/특이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볼때마다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며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가십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독서의 경험을 망치고 말았다는 죄책감.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뭐 이렇게 결벽증적으로 껄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있었나 싶은데, 어쨌든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여기에 적는다

 

좋게 해석하자면, 아마 그때의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떤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나의 지식과 이해력이 다소 부족했다고 막연히 느꼈기에 완독을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히 나의 식견이 깊어졌겠냐마는 다행히 지난 몇년간 이 책이 다루는 시대-17세기-의 분위기를 다소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지식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 특히 학부시절의 마지막 학기에 튜더-스튜어트 시기의 영국사를 수강한 것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공간적 배경이 다르다고는 하나 어쨌든 서유럽이라는 큰 틀에서 묶일 수 있는 인접국인데다가 비슷한 세계관, 환경, 사회적 갈등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들이니만큼 대강의 분위기 파악에는 도움이 되었다.

 

17세기

서문에서 세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를 위협하는 어떤 힘이 덮칠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고 있다가 사회의 긴장 상황을 틈타 잠입하는 것이다... 그 힘은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는데, 이때 이 장치와 통로는 어떤 '불안'을 위해 사용된다... 그 힘은 울타리를 부수고 사회의 배수로를 범람하고 길을 뚫는다나중에 물이 빠지면 그 길 끝에는 다른 풍경, 다른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이는 이질적 요소의 침입인가 아니면 어떤 과거의 반복인가? 역사가는 결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이런 돌연한 팽창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화들이 되살아나서 이 이상한 것들의 압력에 대해 표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p 9)

굳이 위 문단을 인용한 것은 위 내용이 작가가 루됭의 마귀들림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세르토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유럽을 휩쓴 마녀/마귀들림 사건들이야말로 그 특정 시대가 갖고 있는 불안과 잠재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것은 교회와 법이라는 기존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여 사회적 불안을 잠재우는 동시에 단기적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복무하나 결과적으로는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이 끝났을 때 근대적 이성과 계몽으로 대표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종교와 교회권력의 영역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고 국가권력이 이를 대신한다.

 

끔찍한 혼종

작가의 말마따나, 서구 지성사에서 이성의 위치를 현저하게 격상시킨 데카르트의 <방법서설>1637년에 출간된다. 1789년에는 파리에서 바스티유가 함락된다. 그 사이의 150년 동안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들은 이성에 대해 종교에 대해 과학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인가


이 책의 분석을 수용한다면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은 17세기를 살아가는 유럽인들의 심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이다. 16329, 루됭시의 한 우르술라회 수녀원에서 마귀들림 사건이 발생한다. 수녀들은 환각을 보고 몸을 꼬고 신성모독적 언사를 내뱉으며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주술을 걸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수사관을 파견한다. 1011, 생피에르뒤마르셰 교회의 주임신부 위르벵 그랑디에가 문제의 술사로 지목된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깨나 알아주는 엘리트이자 달변가이다. 결국 지방판사, 관리, 법조인을 비롯한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나선다. 그러나 그랑디에는 지역사회와 고위성직자들과 나름의 커넥션을 가진 인물이고, 그간의 스캔들과 송사를 헤쳐나온 경험이 있다


결국 보르도의 대주교가 개입하여 체계적 조치를 요구한다. 수녀들은 격리되어 의사들의 검진을 받는다. 의학은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데, 왜냐면 17세기의 의학이란 것이 현대인의 눈에는 아주 우습기 그지없는 소극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찰과 연역이라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마귀들림 사건에 접근하는데, 이들 대다수는 바로 이 방법론을 통해 수녀들이 초자연적인 힘에 지배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결론은 이 사건에 동원된 의사들의 수식을 보면 그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진지한 과학자라고 생각하는지 절절이 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희극적이다. 17세기는 과학적 추론을 통해 악마와 주술에 도달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국가와 교회

결국 사건은 국왕의 명령으로 교회법원이 아닌 세속의 법원으로 이송된다. 어쨌든 (적어도 당시의 관점에서) 사건의 본질은 마귀들림 현상이기 때문에 구마의식은 재판 과정 내내 행해진다. 이 과정은 일종의 지역 명물이 되어 온갖 명사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된다. 재판 전후로 사건에 대한 출판물이 성행한다. 교회는 이를 즐기는 듯이 온갖 성유물과 신부를 동원해 쇼를 펼친다. 성유물을 갖다대고, 때리고, 심문하면 수녀들은 몸을 비틀고 난삽한 동작들을 취하고 경기한다. 이 모든 스펙터클은 대중들에게 교회의 언어와 권위를 재확인시키지만, 세르토가 분명히 지적하듯이 이 시기 이전의 구마의식은 이렇게까지 요란하지 않았다. 이전시기의 구마의식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신부가 몇 마디 말을 하면 끝나는 구조였(다고한). 이 마귀들림 사건이야말로 교회의 언어가 권위를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이 사건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 역시 -재상 리슐리외와 그의 지방관 로바르드몽으로 대표되는- 국가이성이며 최종판결을 내리는 것 역시 세속의 법원이다.  

 

총체적 서술에 대해

나는 이 사건에 대한 세르토의 분석 중 가장 큰 틀이 결국 근대이성의 출현과 교회로 대표되는 그 이전의 사회적 구조간의 갈등이라고 보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갈등의 축이 존재한다. 세르토는 서장에서 이미 루됭이 프랑스 내에서 신교와 구교간의 영적 전쟁의 최종전선에 해당하는 도시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도시에서 일어난 영적 스캔들은 결국 교회이건 국가이건 당대 권력자들의 이목을 끌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잘생기고 달변가였으나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주임신부 그랑디에는 이미 그전에도 여러번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 있었고,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주민인 그의 부모는 루됭의 지역사회 엘리트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분석은 사건의 핵심 중 하나인 수녀원장 장 데장주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방의 귀족 집안의 여러 딸들 중 하나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경미한 장애를 입었다. 그때문에 잔의 어머니는 그를 사교계와 결혼시장 대신 수녀원으로 보냈다. 어린시절의 짧은 수녀원 생활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다른 딸들에게는 화려한 옷을 입히면서 잔에게는 수수한 옷을 입히는 둥 그를 차별했다고 한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영민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나 결국 세속사회에서 별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루됭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특유의 영민함으로 인해 빠른 성공을 했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녀원장이 된다.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이 해결된 이후 잔은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살아있는 기적 취급을 받고 국왕 부처를 만나는 둥 유명세를 얻는다. 잔은 그러한 유명세를 주변인들의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즐긴다. 조서에서 한번 그녀는 그랑디에가 악마를 통해 자신에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녀의 개인적 성장배경은, 그랑디에와 데장주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지역 엘리트간들의 감정의 골은, 이 사건에 있어서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세르토가 서장에서 말했듯, 역사가가 어떤 사건 혹은 국면만을 분석하려고 목적해도 그러한 서술은 결국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가 말하듯, 어떤 것 하나를 파내고자 하면 결국 모든 것들이 감자덩이처럼 딸려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모든 감자덩이들을 다 요리해낸다고 해도 결국 조금 더 총체적인 분석이 나오는 것이지 총체적인 분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불가능성과 남아있는 빈 칸들이 결국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해 마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족

웃긴 포인트: 그랑디에는 생전에 <진리가 허식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분명히 이해될 수 있도록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고 꾸밈없는 추론으로 이끌어낸 명약관화한 근거와 권위에 의해 성직자가 결혼할 수 있음이 증명되는 독신에 대한 논고>라는 출판물을 썼는데 이거 제목이 너무 미사여구 많고 안 간결한 점이 웃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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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바리

저자
윤선자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4-06-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웃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와 문을 부수고 오물을 던진다샤리바리...
가격비교

2014년 7월 14일에 온라인 교보문고에서 서울집으로 주문하였다. 나의 육신은 물론 다른 나라에 있으므로 당장 읽을 생각은 아니었고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내 방에 쌓아놓고 겨울방학에 읽을 생각이었다. 허나 아버지께서 소포를 보낼 때 책을 몇 권 정도는 보내주실 수 있다기에 이 책과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를 우선 부탁하였다. 후자는 그 책의 성격상 너무 컴팩트했기에 상대적으로 이쪽이 굉장히 컨텐츠가 풍부한 느낌이었고, 더불어 흥미진진했다. 초반부는 전에 어쩌다 줏어 읽은 저자의 동일 주제를 다룬 논문과 내용이 다소 겹쳐 심드렁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모르는 이야기가 계속 튀어나와서 동기부여가 되었다.

사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Frederic Maitland의 'A Sketch of Legal History'인데 굳이 이 책을 먼저 포스팅해야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1) 일단 가장 최근에 완독한 책이며 2) 최근에 읽고있는 여러가지 책들과 여러모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3)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최근 독서의 그물에서 그나마 중간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3)에 관해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한 권의 책이 마치 블로그 포스팅처럼 태그를 갖고있다고 생각 했을 때 (e.g. 곰, 샤를마뉴 대제, 미시사, 이미지, 민속학, 민중, 농촌, 숲), 내 최근의 독서에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겹치는 태그가 제일 많다는 것이다.

3)에 관해 가장 길게 설명한 것은 한 마디로 그것이야말로 이 포스팅을 쓰게 하는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동기라는 말이다. 허나 나는 지금 책장정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지금 이 포스트를 쓰며 너무 괴로운 딜레마에 빠져있다. 왜냐면 하드커버에 꽤 두꺼운 그 책을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넣었고, 다시 꺼내기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 책 지옥이었던 방을 큰 맘 먹고 정리했는데 그 시스템을 허물기가 싫어.. 귀찮고 두려워.. 지금 내가 살고있는 자취방에 책장이라곤 두 칸짜리 작은 책장 뿐인데 이 책장에 지난 4학기 동안(나는 중간에 한 번 휴학을 했다)의 대학 교재와 오고가며 산 책들과 도서관에서 빌려온 15 권의 책들이 절묘하게 배치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비슷한 태그를 가진 다른 책들에 관한 포스팅에서 하고, 다음에 엄마 집에 갈때 책을 좀 갖다놔야겠다는 의미 없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이 책에 관한 유의미한 이야기가 있을까 낚여서 들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이만..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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