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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23 20190123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2. 2019.01.08 20190107 최백순 <조선공산당 평전> 2

과거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 독후감(https://dayori.tistory.com/28)에서 말했듯, 테마가 있는 독서를 하기 위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다룬 책을 골라 읽었다. 이 책은 2015년쯤 한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때려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공산당 평전>을 통해 식민지 시기 진보진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대강의 타임라인을 숙지하고 읽어가니 확실히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대단한 연구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긴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전설처럼 회자되던 '현앨리스'라는 개인의 삶이 이제서야 구체적으로 밝혀졌다는 점이 다소 놀랍다. 나 또한 과거에 현앨리스를 '조선의 마타하리'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팜므파탈로 묘사한 뉴스기사 따위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병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궤적에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다.


물론 연구자의 노력을 통해 새로 조명을 받은 사료들이 상당하겠지만, 참고문헌과 주석의 분량을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료 자체의 양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흔적을 남기고 때때로 자신 또한 몇 편의 글을 남겼던 사람의 삶이 단순히 박헌영의 숙청과 관련된 맥락에서 '여간첩' 따위로 납작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우면서도 서글프다. 다만 상당수의 사료가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납득이 된다. 이 책을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삶의 궤적은 미주 각지 - 한반도 - 상해 - 일본 - 체코 등을 넘나드는데, 이러한 사실을 찾아내고 또 현지에 남은 각각의 사료를 발굴해 활용하는 걸 보면 가히 혀가 내둘러진다.     


평소 국민이라는 틀에 잘 맞지 않는 생애를 살아온 개인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경계인과 세계인이라는 말이 동의어는 아니겠으나, 이런 개인들은 대체로 경계인과 세계인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현앨리스 또한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보다는 훨씬 경계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와이에서 출생하여 경성과 상하이, 일본, 러시아, 뉴욕, LA, 체코 등 세계각국에서 활동한 독보적인 이력만을 보면 누구보다도 세계인에 가까워보이지만, 그렇게 활동의 장을 여러번 바꿔야했던 필요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인'이라는 말이 가진 낙관적인 어감을 쉽게 들이댈 수 없다. 저자가 책의 시작과 끝에서 강조하듯이, 현앨리스의 삶을 지배하는 관성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세례였다. '그녀는 3·1 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 운동의 후기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앨리스 본인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는지와는 무관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일견 강요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의 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세계인보다는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어울린다. 마침 이 책의 부제는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다.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매력적인 문장이다. 문장의 명료함과는 별개로, 저자의 이 말이 일반론적으로, 혹은 사학자의 통찰로써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Big History가 대세라고도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즐겨읽었던 많은 역사책들은 그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떠돌다 불혹이 넘어 사상적 조국을 찾아 조선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처형된 현앨리스의 삶과,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반도의 빨갱이들에 매혹되는 나를 보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 있어 그 말은 사실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추신

책을 읽고나서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미국 공산당사, 하와이의 정치사에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이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사료들을 직접 참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혹시 좋은 연구서를 아는 분이 있다면 추천 바람. 굽신굽신.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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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은 '평전'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논하며 시작한다. 저자의 요지는 간단하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각도에서도 과연 '평전'이라는 제목이 적합한가 의문부호가 그려졌다. 어떤 '평'을 담고있기에는 책의 분량이 다소 짧았다. 책의 서술은 조선공산당을 둘러싼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는데 집중한다. 물론 한 명도 아닌 다수의 개인을 포함하는 집단을 다룬 평론을 하려면 그것은 엄청난 연구서가 되어야 할 것이므로 나의 이런 지적은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다. 막상 책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면, 이 책에 <조선공산당 평전> 이상의 다른 더 적절한 제목도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비교적 어릴 때 빨간 물이 들었지만 청소년기-청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나로서는 한국의 사상사와 운동사에 접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획득할 수 있었다. 거의 술자리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빨갱이'로 정체화한지 10년이 지난 이제는 막연한 빨갱이 정서와 친근감을 갖고 있을 뿐, 어디 가서 왼쪽에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애매하고 파편화된 지식을 갖고 살아오던 찰나, 이렇게 누군가 정연하게 시간순으로 엮은 텍스트를 보니 많은 것이 새로 보이고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지금까지 이런 기초적인 배경도 모르고 개화기 사회주의자들을 다룬 책들을 뒤적거렸으니 그동안 배운 게 없지, 실소가 나왔다. 이 다음 책으로는 전에 반쯤 읽고 때려치운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아는 게 좀 있으니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서 많은 정보가 다시 환기됐다. 나는 한 6, 7년 전에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아마 김단야니 주세죽이니 하는 명성 자자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름들도 여기서 처음 봤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평전>을 덮자마자 서재의 책장에서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꺼내서 훑었다. 그때는 그냥 '과거의 전설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일을 했군..'하며 무협지 보듯 했던 내용들이 다시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김철수의 회고를 굉장히 재밌게 읽고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 파벌들에게 적대적인 관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우습게도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을때는 김철수의 반대파였던 화요파에 감정이입을 하며 책을 읽었다. 뭘 잘 모르니까 그때그때 이입을 대상을 찾아가며 페이지를 넘겼던 것이다. 이렇게 몇년전에 읽은 책까지 재독을 한 차례 하고나니 협소한 관점이 다소 극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순간 바로 이렇게 발전한 느낌이 들면 짜릿하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그 역사에 관심이 있되 나처럼 그다지 조예가 없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저자의 비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수많은 파벌과 인물이 다소 짧은 시간 안에 복잡하게 얼키고설키는 역사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내므로 그다지 읽기 어렵지 않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해서 이 주제에 관해 조금 더 본격적인 저술들을 읽는다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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