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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10 20190610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잡담

책의 내용에 대해 쓰기 전에 우선 이 책을 읽게된 내력에 대해 잡담하고 싶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빌린 책이다. 하지만 나도 굳이 돌려줄 생각이 없고, 책을 빌려준 사람도 굳이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라는 이름은 아마 고1때 읽은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처음 접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 하여튼 유의미하게 레비스트로스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그때 처음 읽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대철학으로 갈수록 책이 점점 지루하게 느껴지던 중,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챕터를 재밌게 읽었다. 이런 기호에는 아마 평소 역사학을 좋아하던 취향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완전하게 추상의 영역에서 사고하는 것 보다는, 결국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어쨌든 인간 사회나 언어라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쪽이 나에게는 재밌게 느껴졌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그가 아메리카대륙의 원시사회를 주로 여행하고 연구한 학자였다는 점이 매우 내 흥미를 끌었다. 이는 내가 조셉 캠벨을 읽고 (이 경우 북미이긴 하지만)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한 환상을 어느정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고2 겨울방학 무렵, 당시 친했던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갈 일이 있었다. 친구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고전(특히 한길그레이트북스의 그것들...)이 쌓여있었는데, 마침 그때 <슬픈 열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친구에게 평소에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고, 친구는 그냥 엄마가 서울대 추천 중고생을 위한 인문도서 100선인지 뭐시기를 사온 것이라 답했다. 이쯤에서 친구를 변호하자면 걔는 결국 철학과에 진학했고, 전공만 철학일 뿐 사실은 철학을 싫어하는 나에 비하면 아주 진지한 철학도가 되었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빌렸다. 

 

앞으로 말할 내용을 살짝 언급 하자면, 나는 이 책을 약 1년뒤에, 입시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시점에 읽기 시작헀다. 아마 절반쯤 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몇년동안 내가 이 책을 조금이나마 읽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최근 신변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서울집에 있는 책들을 호주로 부쳤다. 그때 이 책도 언젠가는 읽을 각오로 짐에 포함했다. 그러고나서 이 책을 또 짊어지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는 둥 천신만고를 겪고나니 다른 건 다 때려치우고 이것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겠다고 남한테서 뺏어온건데 이렇게 부피만 차지하게 냅두느니 이참에 읽자는 마음이었다. 그떄부터 주말과 점심시간의 많은 부분을 이 책을 읽는데 할애하기 시작했다. 

 

이런 잡설을 왜 이렇게 길게 쓰냐면, 인간 기억의 허점과 작위성에 대한 기묘한 경험을 이 책을 읽으며 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나는 어느순간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몇년간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적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실로 사소한 조작이고 아마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자신의 기억에 미세한 조작을 가하며 살고있겠지만, 그 오류를 인지하고 알아채는 경험은 꽤 드물 것이다. 

 

이런 기억상의 오류를 인지해낸 과정도 제법 우스꽝스럽다. 책의 절반쯤 못가면 작가가 마테차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기시감이 확신이 되었다. 내가 '마테'라는 기호품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책의 이 장면이었던 것이다. 당시엔 마테차가 대중화 되기 전이었으므로 그러한 기호품의 존재가 상당히 인상 깊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마테차가 뭔지는 기억해놓고 책의 다른 모든 핵심적 부분들과 심지어는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까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이 무슨 바보같은 일인가! 역시 귀찮아도 기록을 열심히 해야한다. 그래서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지금도 귀찮음을 극복하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음.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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