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오랜 팬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20년을 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다. 9월 중순에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3부의 3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1, 2, 3권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3부 연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들었는데, 1권만 사서 읽으면 너무 감질날 것 같아서 여태 참고 있다가 그나마 세권이면 좀 성이 찰 것 같아 이제사 3부를 구해 읽은 것이다. 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하려 카드를 꺼내는데, 그렇게 손에 들어온 세권을 몽땅 읽어버리면 너무 허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알라딘 웹사이트 한구석에 떠있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추천하고 어쩌고.. 스탠더드한 광고문구였지만 어쨌든 델 토로가 추천했다는 것도 그렇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인 것도 그렇고, 마술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룬의 아이들>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의 세계 속에 잠겨있고 싶다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포스팅의 주제가 될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기존에 사고싶었던 책들은 너무 비쌌다...).

물건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면서 나는 <룬의 아이들>의 3부를 개시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 주문은 평소보다 약간 늦게 도착했다. 뭐 시절이 하 수상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나를 며칠간 약간 불행하게 했지만 그만큼 <룬의 아이들>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만큼 빨리 읽혔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 받은 책들을 나는 이틀만에 게걸스럽게 완독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나는 이럴 줄 알고 또 다른 이야기책을 준비했지!

황당하지만 이것이 내가 뭐 마술적 리얼리즘의 비조이자 라틴 아메리카 단편문학의 거장 어쩌구이신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을 읽게 된 계기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단편집이라면 나는 고등학교때 아옌데의 <The Stories of Eva Luna>를 읽은 것 외에는 지식이 일천하다. 그외에는 전부 중장편 소설이었는데, 픽션을 평소에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 그것 역시 탐독한 양이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어느정도 애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유럽/북미의 현대문학에 큰 흥미를 못느끼는데, 아무래도 픽션에 대한 취향이 어릴때 엄마/언니가 읽던 한국의 여성 소설가들 (박완서, 이경자, 박경리, 공선옥 등) 책을 보며 형성되어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읽은 양이 많지는 않지만 동유럽 문학,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현대사로 인해 PTSD를 겪게 된 작가들이 똑같이 PTSD를 겪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다루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20세기 한국 여성문학과 공유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픽션에 대한 기호가 정서적으로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은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 위주로 형성되어가지고 이것은 first world problem’이로군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집중이 안된다는 얘기다. 블로그에 자세히 쓰진 않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었을 때도 대체로 이런 감상이었다.

키로가의 이야기들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나의 기대(위에 서술한대로 현대사... PTSD.. 치유적 글쓰기.. 어쩌구 저쩌구...)에 아주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시대적/세대적 측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키로가가 1878년생에 2차대전이 터지기 전에 죽었으니 사실 이 사람은 완전 20세기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좀 무리가 있다. 저자소개에서 말하듯 키로가가 ‘중남미 환상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라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이 분야가 완전히 성숙하기 이전 세대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소재나 떠오르는 심상은 그간 내가 읽어온 라틴 아메리카 문학과 비슷하되 이야기의 전개나 서술방식등은 포나 메리 셸리의 19세기 영어권 고딕 단편문학들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중남미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구세계적 전통의 부재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닌만큼 이런 기시감은 자연스러울텐데, 어쨌든 나는 이런 중간적인 느낌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내가 그동안 중남미 문학을 읽으면서 좋다고 느꼈던 것들을 상당히 부당하게 이 책에도 기대했던 것 같다.

이 단편집 전반에 대해 미지근한 느낌을 받은 것과 별개로, <목 잘린 닭>은 굉장히 힘 있는 단편이었다. 이것도 사실 소재나 플롯 자체는 여러번 변주되어온 테마일 것이다. 결말이 하나로 예비되어있는 소재를 가지고 독자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은 좋은 스토리텔러만이 가진 기술이고, 그렇기에 누구나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업이 되는 것이겠지 (이렇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쓰고 있자니 죄책감이 드는군요). 그외에는 <가시철조망>이나 <야구아이> 정도가 좋았다.

(동물이 최고다)

수미쌍관을 위해 <룬의 아이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그 세계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 블로그를 만든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겠음.

Posted by 松.
,

자신의 계급 정체성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난하게 컸던 우리 엄마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공순이가 되고 싶었다거나 학교를 안 다니고 돈을 벌러 다니고 싶었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한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로서야 그 시절 엄마의 고민이 각박한 경제상황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어릴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뭐랄까,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평생 중간계급의 생을 영위해온 나로서는 노동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수치스럽고 한심한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은 중간계급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대학원에까지 진학한 교양인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애경로를 밟은 사람이 저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는 당장 쥐꼬리만한 돈을 벌기 위해 훗날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게 자명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순이(!)'가 되겠다는 명예롭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생각을 우리 엄마가 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다시피 어린 시절의 나는 빈곤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공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의 말에 과거의 내가 가진 적의와 거부감이 오히려 당혹스럽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중간계급의 아이가 가진 전형적인 노동/가난혐오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여공’과 ‘문학’을 합친 여공문학이라는 조어가 강렬한 대비를 품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두 단어가 어떤 계급과 결부되어 있는지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학 내부에서도 물론 다양한 시도가 존재해왔지만, 그것의 생산자와 향유층이 대체로 어느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교육수준이 있는 계층에 속해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의 전통에서 노동계급에 속하는 인물상인 여공은 꽤나 인기 있는 주인공이었다. 굳이 순문학적 전통에서 탈피하려고 시도한 장르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박완서 같은 기성작가 역시 여공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을 여럿 발표했으며, 90년대의 후일담 문학은 말할 것도 없다. 문학적 아이템으로써 여공이 가진 인기는 고속성장 시기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에서는 어느정도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그들이 수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그들의 기여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이 필연적으로 중간계급적 정체성과 강하게 결부된 매체라면, 그것은 애초에 노동계급, 더 나아가 여공이라는 주체를 상상하고 재현하기에 적합한 매체인가? 여공문학은 과연 여공들이 누구였는지 재현하는데 성공했는가? 물론 나는 엄마의 10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상상력이 부족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쩌면 예술적 상상력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재현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공문학>에 나타난 분석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이러한 장르적 한계에 봉착해 있었으며, 이러한 태생적 모순이 극복되는 과정이야말로 여공문학이라는 장르의 발전과 역사를 관통하는 테마인 동시에 한국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강력한 시사점이 되고 있다.

저자는 여공문학의 전성기를 크게 식민지 시기인 1920-30년대와 해방 후 산업화 시기인 1970-1990년대로 구분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 두 시기의 여공문학 사이의 연속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식민지 시기의 여공문학은 주로 카프에 속했거나 Sympathizer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던 좌익계통의 작가들에 의해 주로 생산 되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에서 카프니 월북작가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단절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식민지 시기 여공문학의 특징은 (저자에 의하면 강경애의 <인간문제>정도를 제외하고는) 근대적 산업화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철저한 희생양, 그리고 노동계급 남성에 의한 계몽과 구조를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단순히 여성 노동계급의 주체성 혹은 정치적 가능성을 외면한다는 것 이상으로 문제적인데, 이들이 재현한 여공의 서사는 여공들이 실제로 처한 폭력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이해는 특히 공장에서 자행되던 성폭력에 대한 묘사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묘사하는 성폭력은 그저 신체적 약자에 대한 강제적 섹스로 그려지며 이것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여러 취약성을 강조하여 독자의 정념을 끌어내는 장치로 이용되는 데 그친다. 이 좌익 성향의 작가들이 실제로 가진 선의와는 별개로 2-30년대의 여공문학은 작업장 내 성적 위계의 역학과 여공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면적인 이해만을 보이는데 그친다. 저자는 이 시기의 여공문학에서 유일하게 강경애를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난 작가로 꼽는데, 그 이유는 강경애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성폭력이 가지고 있는 도구적이고 공모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 선비가 지주에게 겁탈을 당한 뒤 ‘아들을 낳아 그 집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가 되는 것과 그 집을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p 126)’ 장면이 그렇고 한 여공이 간난이 몰래 감독의 숙직실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그렇다.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일들로 말미암아,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관계는 지속적으로 애매해지고, 증명 불가능하며, 공모적인 것이 되며, 언제든 쉽게 발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강경애 정도를 제외하면 1920-30년대의 여공문학의 성취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듯 하다. 이는 어느정도는 당대의 경제적, 문화적 요소와 연관이 있는데, 이를테면 ‘하층계급 여성들의 높은 문맹률과 그들을 녹초로 만드는 공장 노동이 독서 자체를 불가능한 취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43)’. 그 시절의 여공들은 문학 내부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알 길조차 없었으며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할지에 대해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온정적이고 평면적인 이해는 여공들 스스로가 여러가지 조건(문해력, 최소한의 경제력 등)을 갖추고 작가되기를 시도할 때에서야 어느정도 극복된다.

그렇다면 7-80년대의 여공문학은 단순히 서술주체가 바뀌었다는 것 이외에 어떤 질적 성취를 이뤄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저자는 그 답을 논하기 전에 고속성장 시절 독재정부가 전통적 유교 가부장주의 내부의 젠더 위계질서를 어떤 식으로 산업화 시대에 적용했으며 여러 진영에서 어떤 이미지가 여공들에게 강요되고 있었는지를 짚고 넘어감과 동시에 여공들이 시대의 불평등과 폭력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여성이며 동시에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한 복잡한 억압기제, 몇가지 예를 들자면 빈곤이라는 어려움과 동시에 전통적으로 여성이 바깥일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의 노동하는 여성이 가지는 낙인, 동일방직 사태에서 드러나듯 적극적으로 여성 노동계급을 탄압하는데 가담하기까지 하는 남성 노동계급과의 경쟁 등 다면적이고 뿌리 깊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2-30년대의 여공문학과 여공들이 스스로 작가되기를 실현했던 7-80년대 여공문학의 사이에는 바로 여성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의 복잡다단성을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여공 개인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전하는데 성공했다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러한 텍스트로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그리고 여공문학이 이룬 성취의 어떤 정점으로 신경숙의 <외딴 방>을 거론하는데, 개별의 텍스트에 대한 자세한 비평을 여기 적지는 않겠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조선과 산업화 시기 한국 내부의 여공문학에 한정되어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미권의 산업소설 내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그에 대한 비평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공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결국 책 전반에 걸쳐 더욱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의 여공문학은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중간계급 여성이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바로 그 역사적 순간에 근대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경구가 옳다면, 여성 노동계급의 글쓰기가 근대성, 자본주의 그리고 우리 자신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p 17)

이상으로 2019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을 마친다.

Posted by 松.
,

포스팅 제목의 날짜가 저렇게 생긴 이유는 9월중 핸드폰이 고장나면서 2018년 7월과 2019년 9월 사이의 데이터를 몽땅 유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이 책을 9월중에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튼 올해의 9월과 10월은 너무 다사다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으므로 날짜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둔다.

 

이 책을 산 이유는 전적으로 둔황이라는 제목 때문이다. 나는 전근대사를 읽을 때 코스모폴리턴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기와 지역에 강하게 매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둔황 같은 곳에는 환장할 수 밖에 없다. 일문학에 일천하므로 이노우에 야스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가 이 책에 적힌 약력을 보고 <풍도>의 작가임을 알았다. <풍도>는 나도 들어본 바가 있지... 역덕이니깐...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몇 안되는 여성 인물들의 역할은 실로 기계적으로, 그들의 역할은 남성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끌어내는 데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남성 인물의 심경의 변화나 중요한 행동을 추동하는데 복무한 다음 바로 사라져버린다. 내가 무신경한건지 비위가 좋은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솔직히 희극적이라고 생각했다. 둔황, 그리고 11세기라는 키워드들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에 기대어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책의 재미가 이 이야기가 쓰인 시대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다. 눈에 띄게 문학적으로 아름답거나 엄청난 통찰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이지 1959년에나 쓰일 법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고, 아마도 내 감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1959년에나 쓰일 법한 소설이었다.

Posted by 松.
,

*원래의 순서대로라면 <슬픈 열대> 포스팅을 마무리하고 <역사가의 시간>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해야한다. 하지만 이 책들을 완독한 게 어느덧 머나먼 6월의 일이므로 약간의 복습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그냥 오늘 읽은 책에 대해 쓰기로 한다.

 

이 책은 펭귄의 'Penguin Modern' 시리즈의 45번째 단편집이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펭귄 Modern Classic 시리즈와 헷갈리면 안된다. 일단 표지가 전자의 경우 옥색이고 후자의 경우 회색과 흰색의 구성이기 때문에 막상 책을 실물로 접하면 그 둘이 다른 기획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Penguin Modern은 Modern Classic보다 훨씬 사악한 기획이다. Penguin Modern의 경우 각각의 책들의 부피가 엄청 작기 때문에 그만큼 싸고, 그렇기 때문에 서점에서 아무 생각없이 몇권씩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서점들은 이 책들을 카운터에 진열해놓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나처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결국 돈은 돈대로 낭비하고 한정된 책장의 공간마저 낭비하게 된다. 

 

이 책은 아마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Middlesex>를 구입할 때 같이 샀을 것이다. 멜버른의 Avenue라는 프랜차이즈 서점인데, 동네서점치고는 꽤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쨌든 예의 서점 카운터에도 역시 Penguin Modern 시리즈가 비치되어 있었고 나는 별 생각없이 아는 이름을 보고 이 책을 구매했다. 약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문학작품을 구매할 때 보통 별 생각없이 제목을 보고 꽂히면 그걸 산다. 카슨 매컬러스의 경우도 그렇게 아무 배경지식 없이 Wunderkind라는 단편의 제목이 좋아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은 Modern Classic 시리즈의 일부였다) 충동구매를 한 후 알게된 작가다.

 

그 작품은 내가 그런 식으로 대충 읽은 많은 단편들 중 그나마 잊히지 않고 뇌리에 어떤 인상을 남겼다. 그 책을 읽고 매컬러스에 대한 나름의 리서치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그의 작품을 더 읽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에 어쨌든 이 자에게 'The Heart is a Lonely Hunter'라는 대표작이 있고, 미국 남부 사람이고, 일찍 죽었고, 어려서는 음악을 했고, 정신질환이 있었다는 대강의 지식은 갖게 되었다. 

 

카슨 매컬러스는 장르적으로는 Southern Gothic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사실 나는 미국문학에 큰 애정이 있지는 않기 때문에 매컬러스가 이 규정에 얼마나 정확히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서던 고딕으로 분류되는 작가 중에는 그나마 코맥 맥카시나 테네시 윌리엄스가 익숙한 이름들인데, 주관적으로 그들이 같은 장르로 묶일 정도로 비슷하게 느껴지냐면 역시 잘 모르겠다. 전혀 공통점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냥 미국인 작가들이 미국인 얘기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정도 이상의 유사성은 잘 느끼지 못했다. 이 장르의 정의가 그냥 미국 남부인들의 생활을 핍진성 있게 묘사하는 소설을 일컫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장르적 구분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나는 카슨 매컬러스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생활인들의 이야기만을 하면서도 (강한 생활감은 아무래도 미국문학 전반에서 느껴지는 특징인 것 같다)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멜랑콜릭한것이 상당히 생소하고 유별나게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세 편의 경우 첫번째는 엄마가 유산을 겪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온 경험을 한 소년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프랑스에서 잠깐 귀국한 미국인 이혼남이 전처와 마주치는 이야기, 세번째는 알콜중독자 아내를 가진 젊은 가장의 이야기이다. 다들 개인에게는 나름 엄청난 시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멀리서 보기엔 다소 드라마틱함이 부족한 일상적 딜레마인 것이 사실이다. *마침 세번째 수록작의 제목은 'A Domestic Dilemma'이다* 그렇다고 매컬러스가 상황이 주는 드라마틱함을 넘어 개인의 내면, 추상적인 주제 혹은 미감을 깊게 파고드는 작가인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우울하고 한심한 인생들의 우울하고 한심한 위기와 고뇌와 일상, 감정들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서술한다. 

 

나에겐 1세계인들이 쓴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다소 고역으로 느껴진다. 이런 저어감에는 우스갯거리로 First World Problem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의 호들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예전에 <내 생명 앗아가주오> 독후감을 쓰면서 한번 농담처럼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괴물같은 사회나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PTSD를 앓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대체로 흥미를 잃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개인들의 하찮은 절망에 끈질긴 관심을 쏟는 매컬러스는 꽤 견딜만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 작가의 끈질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松.
,

과거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 독후감(https://dayori.tistory.com/28)에서 말했듯, 테마가 있는 독서를 하기 위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다룬 책을 골라 읽었다. 이 책은 2015년쯤 한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때려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공산당 평전>을 통해 식민지 시기 진보진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대강의 타임라인을 숙지하고 읽어가니 확실히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대단한 연구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긴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전설처럼 회자되던 '현앨리스'라는 개인의 삶이 이제서야 구체적으로 밝혀졌다는 점이 다소 놀랍다. 나 또한 과거에 현앨리스를 '조선의 마타하리'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팜므파탈로 묘사한 뉴스기사 따위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병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궤적에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다.


물론 연구자의 노력을 통해 새로 조명을 받은 사료들이 상당하겠지만, 참고문헌과 주석의 분량을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료 자체의 양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흔적을 남기고 때때로 자신 또한 몇 편의 글을 남겼던 사람의 삶이 단순히 박헌영의 숙청과 관련된 맥락에서 '여간첩' 따위로 납작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우면서도 서글프다. 다만 상당수의 사료가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납득이 된다. 이 책을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삶의 궤적은 미주 각지 - 한반도 - 상해 - 일본 - 체코 등을 넘나드는데, 이러한 사실을 찾아내고 또 현지에 남은 각각의 사료를 발굴해 활용하는 걸 보면 가히 혀가 내둘러진다.     


평소 국민이라는 틀에 잘 맞지 않는 생애를 살아온 개인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경계인과 세계인이라는 말이 동의어는 아니겠으나, 이런 개인들은 대체로 경계인과 세계인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현앨리스 또한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보다는 훨씬 경계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와이에서 출생하여 경성과 상하이, 일본, 러시아, 뉴욕, LA, 체코 등 세계각국에서 활동한 독보적인 이력만을 보면 누구보다도 세계인에 가까워보이지만, 그렇게 활동의 장을 여러번 바꿔야했던 필요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인'이라는 말이 가진 낙관적인 어감을 쉽게 들이댈 수 없다. 저자가 책의 시작과 끝에서 강조하듯이, 현앨리스의 삶을 지배하는 관성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세례였다. '그녀는 3·1 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 운동의 후기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앨리스 본인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는지와는 무관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일견 강요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의 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세계인보다는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어울린다. 마침 이 책의 부제는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다.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매력적인 문장이다. 문장의 명료함과는 별개로, 저자의 이 말이 일반론적으로, 혹은 사학자의 통찰로써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Big History가 대세라고도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즐겨읽었던 많은 역사책들은 그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떠돌다 불혹이 넘어 사상적 조국을 찾아 조선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처형된 현앨리스의 삶과,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반도의 빨갱이들에 매혹되는 나를 보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 있어 그 말은 사실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추신

책을 읽고나서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미국 공산당사, 하와이의 정치사에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이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사료들을 직접 참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혹시 좋은 연구서를 아는 분이 있다면 추천 바람. 굽신굽신.

Posted by 松.
,

책의 서문은 '평전'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논하며 시작한다. 저자의 요지는 간단하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각도에서도 과연 '평전'이라는 제목이 적합한가 의문부호가 그려졌다. 어떤 '평'을 담고있기에는 책의 분량이 다소 짧았다. 책의 서술은 조선공산당을 둘러싼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는데 집중한다. 물론 한 명도 아닌 다수의 개인을 포함하는 집단을 다룬 평론을 하려면 그것은 엄청난 연구서가 되어야 할 것이므로 나의 이런 지적은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다. 막상 책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면, 이 책에 <조선공산당 평전> 이상의 다른 더 적절한 제목도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비교적 어릴 때 빨간 물이 들었지만 청소년기-청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나로서는 한국의 사상사와 운동사에 접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획득할 수 있었다. 거의 술자리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빨갱이'로 정체화한지 10년이 지난 이제는 막연한 빨갱이 정서와 친근감을 갖고 있을 뿐, 어디 가서 왼쪽에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애매하고 파편화된 지식을 갖고 살아오던 찰나, 이렇게 누군가 정연하게 시간순으로 엮은 텍스트를 보니 많은 것이 새로 보이고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지금까지 이런 기초적인 배경도 모르고 개화기 사회주의자들을 다룬 책들을 뒤적거렸으니 그동안 배운 게 없지, 실소가 나왔다. 이 다음 책으로는 전에 반쯤 읽고 때려치운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아는 게 좀 있으니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서 많은 정보가 다시 환기됐다. 나는 한 6, 7년 전에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아마 김단야니 주세죽이니 하는 명성 자자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름들도 여기서 처음 봤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평전>을 덮자마자 서재의 책장에서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꺼내서 훑었다. 그때는 그냥 '과거의 전설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일을 했군..'하며 무협지 보듯 했던 내용들이 다시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김철수의 회고를 굉장히 재밌게 읽고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 파벌들에게 적대적인 관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우습게도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을때는 김철수의 반대파였던 화요파에 감정이입을 하며 책을 읽었다. 뭘 잘 모르니까 그때그때 이입을 대상을 찾아가며 페이지를 넘겼던 것이다. 이렇게 몇년전에 읽은 책까지 재독을 한 차례 하고나니 협소한 관점이 다소 극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순간 바로 이렇게 발전한 느낌이 들면 짜릿하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그 역사에 관심이 있되 나처럼 그다지 조예가 없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저자의 비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수많은 파벌과 인물이 다소 짧은 시간 안에 복잡하게 얼키고설키는 역사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내므로 그다지 읽기 어렵지 않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해서 이 주제에 관해 조금 더 본격적인 저술들을 읽는다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Posted by 松.
,


무려 2019년 최초로 완독한 책이다. 아마 이 책을 샀을때는 제목만 보고 별 생각 없이 샀던 거 같다. 책을 받았을 때, 그리고 또 이 책을 멜번으로 부칠 때 모두 '내가 왜 이런 책을 샀지' 하고 당혹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읽고싶은 종류의 책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나는 내가 이 책을 제목만 보고 산 이유를 쉬이 짐작하고 있다. 나 스스로가 어느정도 바이링구얼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굳이 '어느정도'라는 단서를 다는 이유는 내가 만 12세의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을땐 벌써 이미 한국어가 너무나 견고하게 내 모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절반을 넘는 세월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았으면서도 한국어를 구사할 때 체감하는 자유도를 영어에서 느낀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영어로 꿈을 꾸며, 한국어로 논설문을 쓸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논술교육을 한국어로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쓰기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것은 언어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이중언어 작가>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지 않을 수가.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이 <이중언어 작가ㅡ근현대문학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원을 찾아서>라는 학술회의 원고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인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 책을 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의 주제는 내가 막연히 상상한 것과는 아주 멀었다. 2017년에 읽었던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는 제목만 보고 골랐는데도 운이 좋게 내가 읽고싶었던 내용(바이링구얼 화자의 고유한 인식과 경험)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처참히 실패했다 하겠다... 그렇다고 책 내용이 아주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학문으로써의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한 나로서는 이해에 다소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의 공저자들은 모두 문학 전공자들이다. 각각의 원고에서 저자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몇몇 이중언어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1장 이광수 (한국어/일본어)

2장 횔덜린 (독일어/그리스어)

3장 레싱(독일어)과 세노작 (터키어/독일어)

4장 새뮤얼 베케트 (영어/프랑스어)

5장 앗시아 제바르 (아랍어/프랑스어/베르베르어)

6장 아룬다티 로이 (말라얄람어/힌디어/영어)


흥미롭게도 2장과 4장은 (연구자가 영어 화자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필연적으로) 영어로 쓰여있다. 책의 컨셉에 맞춰 의도한 바도 어느정도 있겠지 싶다. 대체로 절반 정도는 재밌게 읽었지만 그다지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베케트 원고는 도저히 재밌게 읽을 수 없었다. 앗시아 제바르라는 내가 몰랐던 저자를 소개 받은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중근동 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타리크 알리의 소설들을 Verso 출판사가 세일할 때 무더기로 사다놨었는데, 그다지 속도가 붙지 않아서 때려쳤던 적이 있다. 픽션에 있어서는 여성작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서는 이 작가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회가 있다면 제바르의 책을 한 권 사보기로 결정.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번 독서의 가장 큰 교훈은 제목만 보고 책을 사면 안된다는 것, 그거 같다.

Posted by 松.
,

읽기에 앞서

이 리뷰를 어젯밤에 반 정도 열심히 쓰고 임시저장한 뒤 창을 닫았는데 오늘 보니 어쩐지 모르게 글이 날아가있다. 너무 허탈하고 화가 나서 짧게 감상을 쓰도록 하겠다..


책 바깥

지금까지 읽은 유제니디스의 작품은 모두 두권이다. <미들섹스>와 <처녀들 자살하다>가 그 두권인데, 둘 모두 7-80년대의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 없이는 즐기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작품이란 인상을 받았다. 다만 작가가 산문을 제법 아름답게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다소 답답함이 느껴지더라도 책장이 잘 넘어가긴 한다. 그나마 <미들섹스>가 <처녀들 자살하다>보다는 보편적인 테마를 많이 취하고 있는 편인데,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보다 꼭 더 좋은 작품이 되지는 않는 거 같다.


단평

뭐라뭐라 길게 써놓은걸 다 날리니 말 얹을 기운도 사라졌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어떤 스노비즘을 견딜수만 있다면 충분히 즐거운 독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스놉이다. 

Posted by 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