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ebook을 조금 사서 읽는다. 계기는 사소했다. 하루는 장편만화가 너무 읽고 싶은데 뭘 읽어야할지 생각이 안났다. 그래서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ebook을 몇 권 샀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하루, 내가 어릴때 황석영의 <손님>을 보고 왜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의 ebook을 사서 훑어봤다.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고 보니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결국 당초의 목적인 내가 받은 충격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경험으로 인해 내 안의 리미터가 하나 해제되었다나는 ebook을 사기 시작했다.


나에겐 타블렛 PC라던가 ebook 리더 같은 기기가 없으므로 노트북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읽게 된다. 이게 뭔가 싶지만서도 pdf 파일로 무언가를 읽는 것 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내 경우 pdf 리더로 뭔가를 읽어야 하는 경우 텍스트가 아주 재밌지 않은 이상은 2, 3페이지 이상을 견디기가 힘든데 (그래서 보통 인쇄를 한다), 교보문고 SAM이건 크레마건 간에 ebook 전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경우엔 긴 글도 읽을만 했다. 


그러다 며칠 전 알라딘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는데, 페미니즘 도서 ebook을 얼마 이상 구매하면 에코백을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그 에코백이 괜찮아 보여서 ebook 몇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고 또 며칠 뒤 과제를 시작하기 전 스스로를 위무할 목적으로 장바구니의 책을 몇 권 샀다. 근데 ebook 포함 2만원 이상 결제하면 에코백을 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3만원 이상이었다. 결제는 이미 해버린 후였다. 호곡곡고구고고고곡! 빡치지만 어쨌든 책을 산 건 산 것이니 파일을 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SF는 내게 여러모로 생소한 장르다. 나는 언제나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했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표지가 너덜너덜 떨어질 때까지 읽어댔고, 도서관에서 아무 민속학 책이나 집어 곧잘 읽었으며,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동양의 고대사에 끌리곤 했다. 신화나 전설 따위를 읽고 있으면 인간의 상상력이라는게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보편성을 확인 받는 것 같아 안심도 됐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에 대한 기대'는 없는 편이다. 나에게 스포일러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건 거기서 거기고 중요한 건 전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에게서 몇 마디 정보를 얻는다고 그게 이야기를 겪는 나의 경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어쨌든 나는 특정한 형식의 이야기들이 다른 형식의 이야기들보다 매력적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각기 다른 정서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할 말이 있다). 


각설하고, 알라딘 이벤트라는 사소한 계기가 없었다면 SF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분위기를 타서 SF 도서를 몇 권 더 주문하기까지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서사라는 것에 대해 큰 기대가 없고 또한 작중 묘사가 엄청 강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장르적 쾌감이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애초에 내가 장르적 쾌감이라는 것을 얻기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이런 스스로의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갖고있는 어떤 태도에 꽤 매력을 느꼈다. 물질적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묘사, 휴머니즘 같은 것들. 소설이건 영화건 뭐건 간에, 현대의 매체들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과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적 수준이 세계에 대한 다층적인 묘사를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나갈 수 있게 하는 데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예를 들어보자. 단순히 옛날 이야기에서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이 '지상낙원', '천국', '내세', 정도로 등장했다면 작중 등장하는 두 개의 다른 세상(둘 다 나름대로 인류가 열망해온 '지상낙원'들이라고 볼 수 있는)은 모두 복잡한 결을 갖고 있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에 설득력이 있었다. 


더욱 맘에 드는 점을 꼽자면 단순히 (너무나 거장인) 작가가 입체적인 세상을 직조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국 작가가 어떤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건 문학 속에서건 너무 비대하고 복잡해진 이 시대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도 선택은 틀릴 수 있고 나의 선의와 상관 없이 책임은 돌아온다. 선택 그 자체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꼭 해야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선택'은 멍청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혹은 작가는, 선택을 한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물리학자인 주인공의 이론이 아주 모호한 형태로만 제시되는 것에 대해 다소 답답함을 느꼈는데 어차피 과학적으로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라 이 부분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수포자는 웁니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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