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순서대로라면 <슬픈 열대> 포스팅을 마무리하고 <역사가의 시간>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해야한다. 하지만 이 책들을 완독한 게 어느덧 머나먼 6월의 일이므로 약간의 복습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그냥 오늘 읽은 책에 대해 쓰기로 한다.

 

이 책은 펭귄의 'Penguin Modern' 시리즈의 45번째 단편집이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펭귄 Modern Classic 시리즈와 헷갈리면 안된다. 일단 표지가 전자의 경우 옥색이고 후자의 경우 회색과 흰색의 구성이기 때문에 막상 책을 실물로 접하면 그 둘이 다른 기획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Penguin Modern은 Modern Classic보다 훨씬 사악한 기획이다. Penguin Modern의 경우 각각의 책들의 부피가 엄청 작기 때문에 그만큼 싸고, 그렇기 때문에 서점에서 아무 생각없이 몇권씩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서점들은 이 책들을 카운터에 진열해놓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나처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결국 돈은 돈대로 낭비하고 한정된 책장의 공간마저 낭비하게 된다. 

 

이 책은 아마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Middlesex>를 구입할 때 같이 샀을 것이다. 멜버른의 Avenue라는 프랜차이즈 서점인데, 동네서점치고는 꽤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쨌든 예의 서점 카운터에도 역시 Penguin Modern 시리즈가 비치되어 있었고 나는 별 생각없이 아는 이름을 보고 이 책을 구매했다. 약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문학작품을 구매할 때 보통 별 생각없이 제목을 보고 꽂히면 그걸 산다. 카슨 매컬러스의 경우도 그렇게 아무 배경지식 없이 Wunderkind라는 단편의 제목이 좋아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은 Modern Classic 시리즈의 일부였다) 충동구매를 한 후 알게된 작가다.

 

그 작품은 내가 그런 식으로 대충 읽은 많은 단편들 중 그나마 잊히지 않고 뇌리에 어떤 인상을 남겼다. 그 책을 읽고 매컬러스에 대한 나름의 리서치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그의 작품을 더 읽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에 어쨌든 이 자에게 'The Heart is a Lonely Hunter'라는 대표작이 있고, 미국 남부 사람이고, 일찍 죽었고, 어려서는 음악을 했고, 정신질환이 있었다는 대강의 지식은 갖게 되었다. 

 

카슨 매컬러스는 장르적으로는 Southern Gothic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사실 나는 미국문학에 큰 애정이 있지는 않기 때문에 매컬러스가 이 규정에 얼마나 정확히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서던 고딕으로 분류되는 작가 중에는 그나마 코맥 맥카시나 테네시 윌리엄스가 익숙한 이름들인데, 주관적으로 그들이 같은 장르로 묶일 정도로 비슷하게 느껴지냐면 역시 잘 모르겠다. 전혀 공통점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냥 미국인 작가들이 미국인 얘기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정도 이상의 유사성은 잘 느끼지 못했다. 이 장르의 정의가 그냥 미국 남부인들의 생활을 핍진성 있게 묘사하는 소설을 일컫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장르적 구분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나는 카슨 매컬러스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생활인들의 이야기만을 하면서도 (강한 생활감은 아무래도 미국문학 전반에서 느껴지는 특징인 것 같다)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멜랑콜릭한것이 상당히 생소하고 유별나게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세 편의 경우 첫번째는 엄마가 유산을 겪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온 경험을 한 소년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프랑스에서 잠깐 귀국한 미국인 이혼남이 전처와 마주치는 이야기, 세번째는 알콜중독자 아내를 가진 젊은 가장의 이야기이다. 다들 개인에게는 나름 엄청난 시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멀리서 보기엔 다소 드라마틱함이 부족한 일상적 딜레마인 것이 사실이다. *마침 세번째 수록작의 제목은 'A Domestic Dilemma'이다* 그렇다고 매컬러스가 상황이 주는 드라마틱함을 넘어 개인의 내면, 추상적인 주제 혹은 미감을 깊게 파고드는 작가인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우울하고 한심한 인생들의 우울하고 한심한 위기와 고뇌와 일상, 감정들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서술한다. 

 

나에겐 1세계인들이 쓴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다소 고역으로 느껴진다. 이런 저어감에는 우스갯거리로 First World Problem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의 호들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예전에 <내 생명 앗아가주오> 독후감을 쓰면서 한번 농담처럼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괴물같은 사회나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PTSD를 앓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대체로 흥미를 잃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개인들의 하찮은 절망에 끈질긴 관심을 쏟는 매컬러스는 꽤 견딜만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 작가의 끈질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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