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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23 20190123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과거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 독후감(https://dayori.tistory.com/28)에서 말했듯, 테마가 있는 독서를 하기 위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다룬 책을 골라 읽었다. 이 책은 2015년쯤 한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때려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공산당 평전>을 통해 식민지 시기 진보진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대강의 타임라인을 숙지하고 읽어가니 확실히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대단한 연구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긴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전설처럼 회자되던 '현앨리스'라는 개인의 삶이 이제서야 구체적으로 밝혀졌다는 점이 다소 놀랍다. 나 또한 과거에 현앨리스를 '조선의 마타하리'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팜므파탈로 묘사한 뉴스기사 따위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병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궤적에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다.


물론 연구자의 노력을 통해 새로 조명을 받은 사료들이 상당하겠지만, 참고문헌과 주석의 분량을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료 자체의 양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흔적을 남기고 때때로 자신 또한 몇 편의 글을 남겼던 사람의 삶이 단순히 박헌영의 숙청과 관련된 맥락에서 '여간첩' 따위로 납작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우면서도 서글프다. 다만 상당수의 사료가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납득이 된다. 이 책을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삶의 궤적은 미주 각지 - 한반도 - 상해 - 일본 - 체코 등을 넘나드는데, 이러한 사실을 찾아내고 또 현지에 남은 각각의 사료를 발굴해 활용하는 걸 보면 가히 혀가 내둘러진다.     


평소 국민이라는 틀에 잘 맞지 않는 생애를 살아온 개인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경계인과 세계인이라는 말이 동의어는 아니겠으나, 이런 개인들은 대체로 경계인과 세계인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현앨리스 또한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보다는 훨씬 경계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와이에서 출생하여 경성과 상하이, 일본, 러시아, 뉴욕, LA, 체코 등 세계각국에서 활동한 독보적인 이력만을 보면 누구보다도 세계인에 가까워보이지만, 그렇게 활동의 장을 여러번 바꿔야했던 필요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인'이라는 말이 가진 낙관적인 어감을 쉽게 들이댈 수 없다. 저자가 책의 시작과 끝에서 강조하듯이, 현앨리스의 삶을 지배하는 관성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세례였다. '그녀는 3·1 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 운동의 후기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앨리스 본인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는지와는 무관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일견 강요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의 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세계인보다는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어울린다. 마침 이 책의 부제는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다.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매력적인 문장이다. 문장의 명료함과는 별개로, 저자의 이 말이 일반론적으로, 혹은 사학자의 통찰로써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Big History가 대세라고도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즐겨읽었던 많은 역사책들은 그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떠돌다 불혹이 넘어 사상적 조국을 찾아 조선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처형된 현앨리스의 삶과,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반도의 빨갱이들에 매혹되는 나를 보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 있어 그 말은 사실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추신

책을 읽고나서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미국 공산당사, 하와이의 정치사에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이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사료들을 직접 참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혹시 좋은 연구서를 아는 분이 있다면 추천 바람. 굽신굽신.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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