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 잠깐 한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예정에 없던 여행이라 체류기간도 짧고 정신 없었지만 어쨌든 장거리 비행을 해야했기 때문에 책을 읽을 짬은 있었다. 물론 독후감을 쓰기엔 여의치 않은 환경이어서 책로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책을 읽고나서 다소 시간이 지났기에 이 기간 읽은 책들을 한꺼번에 묶어 기록을 남긴다. 최근 거취에 변화가 있어서 책들이 현재 내 수중에 없으므로 자세한 리뷰는 남기지 못할 듯. 


20190227-20190316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에 대한 최근 연구의 동향을 주제별로 요약하는데 의의가 있는 책이다. 여말선초 시기를 '교체기' 혹은 '전환점'으로 인식하여 왕조교체기 전후에 뚜렷한 역사적 진보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존 연구와 달리, 고려말 조선초의 연속성에 집중할뿐만 아니라 두 왕조 사이에 실질적이라 할만한 단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연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여말선초에 대한 나의 인식은 일반 대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않고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한 지식도 일천하지만 어쨌든 크게 놀라운 논의는 아니었다. 역덕으로서의 경험상 아무 역사적 주제나 잡고 그 주제에 대한 연구사를 보면 대충 비슷한 그림이 나온다.. 근대초에서 20세기 초반까지를 지배하는 단선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전통사관이 있고 (물론 한국의 경우 근대의 이식이 늦었으므로 이러한 역사적 서술이 훨씬 더 나중까지 보편적이다) 그 뒤로는 실증과 객관성에 집중하는 수정주의적 사관이 대두하고.. 연구가 많이 된 주제면 여기서 후기수정주의, 생활사, 미시사, 심성사, 개념사 기타등등 기타등등이 등장하고... 뭐 그렇다. 


이러한 흐름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역사적 주제를 디립다 파게 되면 기존에는 엄청난 단절 혹은 발전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적 변화가 가능했던 조건에 대해 더욱더 풍부하게 알게 되고 그렇게 지식이 축적될수록 전후의 연속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건 필연인듯 해서다. 물론 프랑스 혁명처럼 그것을 기점으로 전과 후가 완전히 뒤바뀌는 사건들이 있긴 한데, 그정도 씩이나 되니까 혁명이라고 불러주는 것이겠지.... 물론 이런 기념비적 사건들에 대한 해석마저도 요즘 트렌드는 장기적 변화에 집중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긴 하다.


여튼 한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여말선초로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다양한 연구자들이 이 시기의 정치사/제도사/외교사 따위의 무거운 주제부터 복식사처럼 생활과 밀접한 주제까지 정리한 내용들이 컴팩트하게 담겨있으므로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서 나쁠 것 없다. 다만 열 명이 넘는 연구자들이 공저한 책이므로 이 시기에 대해 깊고 총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그런 분석을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그런 쪽 책을 읽고 싶은 분은 다른 책을 읽으세용~


20190301-20190316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1-4권


이 책을 읽게 된 배경은 좀 특이하다. 일단 처음 이 책에 대해 인지하게 된 정황은 서점의 마케팅을 통해서였다. 하도 프로모션을 많이 해대길래 보니까 TV에서 김영하가 언급을 해서 이렇게 됐다고 한다. 여튼 크게 관심은 없었는데, 동생 생일이 3월에 있어 선물로 뭘 줄까 생각하다가 만화책이나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절한 작품을 알아보던 중 그냥 가격대도 적절한 거 같아서 이 책을 골랐다. 그외에 고려했던 것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비쌈), <35년> (내용이 너무 무거움), 이향원의 <떠돌이 검둥이> (하필 2권이 절판) 등이 있었으나 괄호 안에 서술한 이유들 때문에 기각. 주문해놓고 그래도 선물하는 사람이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되겠다 싶어서 인터넷에서 체험판을 구해서 읽었다. 


근데 그 체험판이 너무 재밌었다!


그래서 서울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이 아직 뜯지도 않은 자기 생일선물을 내가 먼저 뜯어보는 사태가 발생했다. 1권의 반 정도 분량은 체험판과 겹쳐서 앉은 자리에서 바로 읽고 2, 3권은 숙소로 들고가 읽었다. 노인들이 해방/한국전쟁 이전의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를 보고있자면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된다. 위에서 어떤 사건을 기준으로 시대간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건 유행이 지났다는 얘기를 해놓고 이렇게 말하자니 민망하긴 한데, 확실히 해방/한국전쟁 이전의 한반도는 그 이후의 한반도와는 너무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볼때마다 어쩜 동네마다 풍속도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고, 우리가 상상하던 과거와 그들이 회고하는 과거의 괴리에 놀라게 된다. 특히 유교적 윤리규범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한데, 전근대 한반도 역사에서 유교가 주된 통치이념으로 쓰인 역사가 긴 건 사실이지만 실제 농촌사회에서의 적용은 우리가 상상하는만큼 철저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유교가 근대화라는 목적에 복무하기 위해 취사적으로 유교적 요소들을 선택해 만들어진 '근대화된 유교'가 아닌가 뭐 이런 생각도 들고... 어쨌든 이 분야에 전문가도 아니므로 유교에 대한 잡설은 여기서 마치겠다.


해방이전 - 이북 - 여성서사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박완서를 즐겨 읽었던 사람들이라면 좋아할만한 만화다. 풍속사/미시사 따위에 관심이 있어도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듯. 



최혜영 20190312-20190321<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이 책 또한 매우 재미있게 읽었는데 고대그리스사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해서 면밀한 논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고대 그리스 비극을 문학적, 내부적 시선이 아닌 국제관계사적 맥락 혹은 의례적/종교적 맥락에서 분석을 시도하는 책이다. 서문을 읽으면서 그러고보니 이건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발상인데 지금까지 왜 이러 논의를 못봤을까, 뒤통수를 맞은 거 같았다. 고대의 '그리스'가 여러 도시국가의 연맹체라는 사실을 아는 시점에서도 꽤 놀라운 점이 많았다. 그렇다, 왜 아테네인들은 비극을 쓰면서 자기네 도시가 아닌 남의 나라 얘기를 그렇게 써제꼈는가...!! 당연히 한번쯤은 가져볼 의문인데 그리스 비극이 문학작품으로서 갖고 있는 고전의 이미지가 너무 커서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해봤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제관계사/정치적 맥락에 대한 분량과 의례적/종교적 맥락에 대한 분석에 대한 분량의 차이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많은 분량이 할애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이 부분은 과거의 논의가 풍부하다고 생각해 책에 안썼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두 부분의 순서가 뒤바뀌었단 생각이 들었다. 의례적/종교적 맥락에 대한 논의가 선행하고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논의가 뒤에 나와야 이것들이 의례의 일환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동원했고, 그를 통해 필연적으로 정치적 선전도구로 기능했는지 순차적으로 이해가 될듯.


~~~~~~~~~~~이것으로 한국 여행 기간 동안 읽은 책들에 대한 날림 리뷰를 마침~~~~~~~~~~~~


Posted by 松.

누군가 고대사에 대한 나의 매혹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오래됐기 때문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역사를 향한 나의 집착은 그것이 주는 효용과 교훈과는 무관한 일종의 기벽에 가깝다고 여러번 말해왔지만, 특히 고대사에 관해서라면 나는 내가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기본적으로 고대의 텍스트들은 거의가 평면적이고, 그것들이 내재한 사고방식은 낯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그것들에 매혹되고 만다. 


고대인과 현대인은 인간의 인간됨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도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 E H 카는 과거는 외국이나 다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간의 차이는 과거와 현대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마 고대인들의 기록과 그것을 다룬 역사가들의 글을 읽으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과 세계의 가능성에 희열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내용으로써의) 과거가 좋았다던지 생각하는 복고주의자는 아니다. 


내가 책을 고를때 늘 그렇듯이 <중국사유>는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책의 제목과 주제에 끌려 산 책이다. 그나마 이번에는 책을 사기전에 (다행히도) 저자와 책의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검색 자체는 마친 상태에서 구매했다. 이 책이 1934년에 출간된 고전임을 깨달았을때는 구매를 다소 고민했다. 내가 연구사를 알고싶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거의 한 세기 이전의 연구성과가 캐주얼한 독자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지 자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4년에 나온 책을 굳이 2015년에 번역해 출간해야할 정도의 의미가 있다면 아직도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아니겠나 생각하며 구매를 결정했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 되었다. 


현대적 연구가답게 그라네는 일단 고전적 동양철학의 형성에 대한 전승과 통설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그것에 섣불리 기댈 수 없음을 못박고 시작한다. 그는 보존된 사료의 빈약함을 지적하며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지나치게 신격화된) 몇 개의 경전을 가지고 고대 중국의 사상사/학설사를 연대기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신 그라네는 중국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관과 우주관을 설명하고, 학파와 무관하게 중국사유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몇가지 개념들을 짚어내는데 만족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훌륭하고 합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만, 그라네의 이런 태도는 동시에 이 책이 불가피하게 가질 수 밖에 없는 약점들을 노출시킨다. 이 책이 쓰인 시기상 20세기 초반 이후의 문헌학/고고학/언어학적 성과들을 반영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과들을 가지고도 ‘고대 중국의 사상사/학설사를 연대기적으로 복원’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섣불리 설정하긴 어렵겠지만,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이고 야심찬 논의는 그라네 이후의 저자들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동서양 지성사의 차이에 평소 지대한 관심이 있던 바, <중국사유>를 읽고 상당히 고무되어 그라네의 또 다른 대표작인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 역시 구매했다. <중국사유>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러웠는데, 개인적으로는 결론 자체는 납득이 가는데 (사실 근대적 심성을 가지고 <시경>을 읽는다면 당도할 수 밖에 없는 결론이긴 하다) 비해 분석 자체는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할때가 있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시경의 행로편에 대한 분석이 그러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시경의 연애시가 의례적으로 축제에서 행해지던 젊은 여성과 남성의 경쟁과 성혼 맥락에서 불리웠단 추론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적용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라네의 분석이 큰 틀에서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만, 그가 내세운 구체적인 결론들(특히 축제가 일어난 장소와 당대의 풍습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는 과연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때가 많았다. 


사실 <중국사유>도 그렇고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 또한 그렇듯이 고대중국의 풍습과 정신세계에 대해 어느정도 노출이 된 적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새로운 결론들을 선사하는 책들은 아니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이라도 한번 뒤적거려봤거나 삼국지나 초한지 따위에 열광해본적이 있다면 물론 이렇게 깊은 논의는 낯설겠지만서도 중국인의 우주관이나 명명술,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에 철저히 조응하고자 하는 생활에서의 예법들 자체는 ‘아 그게 그래서 그렇구나’ 하면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라네를 비롯한 비-동양문명 출신의 중국학자들이 이 세계관에 침투하고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하는 점이다. 자신이 접하지 않은 상이한 사유체계를 접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어떻게 다른 세계에 살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지닌 채 장바구니에 서구 학자들의 중국학 책을 몇권 더 장바구니에 때려박으며 글을 마친다.

Posted by 松.

과거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 독후감(https://dayori.tistory.com/28)에서 말했듯, 테마가 있는 독서를 하기 위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다룬 책을 골라 읽었다. 이 책은 2015년쯤 한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때려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공산당 평전>을 통해 식민지 시기 진보진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대강의 타임라인을 숙지하고 읽어가니 확실히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대단한 연구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긴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전설처럼 회자되던 '현앨리스'라는 개인의 삶이 이제서야 구체적으로 밝혀졌다는 점이 다소 놀랍다. 나 또한 과거에 현앨리스를 '조선의 마타하리'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팜므파탈로 묘사한 뉴스기사 따위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병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궤적에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다.


물론 연구자의 노력을 통해 새로 조명을 받은 사료들이 상당하겠지만, 참고문헌과 주석의 분량을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료 자체의 양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흔적을 남기고 때때로 자신 또한 몇 편의 글을 남겼던 사람의 삶이 단순히 박헌영의 숙청과 관련된 맥락에서 '여간첩' 따위로 납작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우면서도 서글프다. 다만 상당수의 사료가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납득이 된다. 이 책을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삶의 궤적은 미주 각지 - 한반도 - 상해 - 일본 - 체코 등을 넘나드는데, 이러한 사실을 찾아내고 또 현지에 남은 각각의 사료를 발굴해 활용하는 걸 보면 가히 혀가 내둘러진다.     


평소 국민이라는 틀에 잘 맞지 않는 생애를 살아온 개인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경계인과 세계인이라는 말이 동의어는 아니겠으나, 이런 개인들은 대체로 경계인과 세계인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현앨리스 또한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보다는 훨씬 경계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와이에서 출생하여 경성과 상하이, 일본, 러시아, 뉴욕, LA, 체코 등 세계각국에서 활동한 독보적인 이력만을 보면 누구보다도 세계인에 가까워보이지만, 그렇게 활동의 장을 여러번 바꿔야했던 필요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인'이라는 말이 가진 낙관적인 어감을 쉽게 들이댈 수 없다. 저자가 책의 시작과 끝에서 강조하듯이, 현앨리스의 삶을 지배하는 관성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세례였다. '그녀는 3·1 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 운동의 후기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앨리스 본인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는지와는 무관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일견 강요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의 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세계인보다는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어울린다. 마침 이 책의 부제는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다.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매력적인 문장이다. 문장의 명료함과는 별개로, 저자의 이 말이 일반론적으로, 혹은 사학자의 통찰로써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Big History가 대세라고도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즐겨읽었던 많은 역사책들은 그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떠돌다 불혹이 넘어 사상적 조국을 찾아 조선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처형된 현앨리스의 삶과,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반도의 빨갱이들에 매혹되는 나를 보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 있어 그 말은 사실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추신

책을 읽고나서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미국 공산당사, 하와이의 정치사에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이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사료들을 직접 참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혹시 좋은 연구서를 아는 분이 있다면 추천 바람. 굽신굽신.

Posted by 松.

나의 독서 방침과 이 블로그의 용도에 대해 2014년 무렵 간략하게 쓴 적 있지만; 1) 그 설명이 적절하게 쓰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2) 요즘 조금 더 적극적으로 블로깅을 하고 있으므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당시 나는 이렇게 썼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들이 읽을만한 리뷰를 쓰는 곳이 아니라 나를 위한 다이어리를 쓰는 곳이다. 현재 내가 구상하는 이곳의 이미지는 단어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단어 대신 책들을 그자리에 집어넣고, 옆에 나에게 필요한 설명들을 쭈욱 쓰고, 그렇게 모으고 모아서 일종의 다타베이스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다타베이스'라는 큰 이미지는 아직도 유효하다. 다만 이제 와서는 어째서 이런 컨셉을 잡았는가 조금 설명을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대단한 다독가는 아니지만 어느 나라에 떨어지던간에 성인 평균보다는 조금 더 읽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느 순간 독서라는 행위와 책에 대한 나의 물신적 집착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순간에는 저자가 제공하는 문제의식과 사고를 따라가면서 어느정도 충만한 경험을 하는데, 책을 덮고나서는 뭘 봤고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 것이다... 그때 무언가 책, 나아가 지식 전반을 대하는 나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책을 읽고나서 내용이 기억이 안나는 게 문제라면 가장 무난한 해결책은 역시 독후감을 쓰는 것이다. 독후감을 쓰는 행위는 단순히 내 감상을 받아적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필연적으로 나의 인상들을 되새김질 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므로 마치 공부를 하며 노트를 쓰고 정리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그래서 나는 일단 책을 읽고나면 독후감을 쓴다고 방침을 정했다.


동시에 나는 어릴적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던 <신화의 힘>의 어느 부분을 떠올렸다. 이 책은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언론인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인데, 사실 뭐 어떤 대단한 통찰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신화라는, 대단히 매력적일 수 밖에 없는 주제의 힘에 상당히 기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0대 시절 이 책을 너무나 좋아해서 스무번은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딘가에서 조셉 캠벨은 독서에 대한 조언(우웩)을 하며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한 저자의 책을 다 읽고, 그 저자가 읽은 책을 다 읽고, 그 다음에 그 책을 쓴 저자들을 다 읽고, 무한반복, 이렇게 독서의 폭을 넓혀가라고. 나는 이것을 절대 그대로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한번 이 비슷한 짓을 해보고 싶다고는 생각했다. 어쨌든 한 개인이 이 세상의 모든것을 읽을수도 없고 또 모든 주제에 통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한 룰을 따르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어떤 맥락이 있는 독서를 하기 마련이다. 이 블로그를 개설할 무렵 나는 우연히 넓게 서양 중세사에 발을 걸친 주제들을 다룬 책을 연속적으로 몇 권 읽고 있었다. 미셸 파스트로의 <The Bear>, 윤선자의 <샤리바리>, Maitland의 <A Sketch of English Legal History> 등 이었는데, 단지 넓은 의미에서 서양중세사의 영역에 있을뿐 서로 상이한 주제를 다룬 이 책들이 서로간의 갭에도 불구하고 중첩되는 부분이 있고 이 시대에 관해 어떤 총체적 이해를 돕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무언가 블로그의 태그 기능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독후감을 써서 중첩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정리해서 저장한 뒤 클릭만 한번 하면 마치 마인드맵처럼 서로의 연관성을 쭉 펼쳐 볼 수 있는, 좁은 주제의 이해부터 넓은 총체의 이해를 돕는 다타베이스를 구축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블로그를 개설했다. 블로그엔 태그 기능이 있으므로 그것을 활용하면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 이야기한 방법으로 블로그를 활용하면 내가 어떤 책을 읽던 태그만 정리해두면 언젠가는 각각의 책의 주제 및 성격이 어떻게 중첩되는지 언젠가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말했듯이 내가 대단한 다독가도 아니고, 또 내가 읽은 모든 책에 독후감을 쓰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달은 지금은 실제 독서에도 어느 정도 맥락이 있는 독서를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었기 때문에 정병준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다음 책으로 골랐다. 이 독후감도 곧 올라올 것이다. 


이 글을 씀으로 인해 이 블로그의 구독자들이 '이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있나' 대략의 그림을 얻었길 바란다. 책 추천과 피드백, 오류 정정과 보충 지식 등은 언제나 환영! 앞으로는 많은 교류를 기대하며 (이 블로그에는 2014년 개설 이래 단 두 개의 코멘트만이 달렸다..) 이만 다소 장황한 포스트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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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松.

책의 서문은 '평전'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논하며 시작한다. 저자의 요지는 간단하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각도에서도 과연 '평전'이라는 제목이 적합한가 의문부호가 그려졌다. 어떤 '평'을 담고있기에는 책의 분량이 다소 짧았다. 책의 서술은 조선공산당을 둘러싼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는데 집중한다. 물론 한 명도 아닌 다수의 개인을 포함하는 집단을 다룬 평론을 하려면 그것은 엄청난 연구서가 되어야 할 것이므로 나의 이런 지적은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다. 막상 책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면, 이 책에 <조선공산당 평전> 이상의 다른 더 적절한 제목도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비교적 어릴 때 빨간 물이 들었지만 청소년기-청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나로서는 한국의 사상사와 운동사에 접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획득할 수 있었다. 거의 술자리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빨갱이'로 정체화한지 10년이 지난 이제는 막연한 빨갱이 정서와 친근감을 갖고 있을 뿐, 어디 가서 왼쪽에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애매하고 파편화된 지식을 갖고 살아오던 찰나, 이렇게 누군가 정연하게 시간순으로 엮은 텍스트를 보니 많은 것이 새로 보이고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지금까지 이런 기초적인 배경도 모르고 개화기 사회주의자들을 다룬 책들을 뒤적거렸으니 그동안 배운 게 없지, 실소가 나왔다. 이 다음 책으로는 전에 반쯤 읽고 때려치운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아는 게 좀 있으니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서 많은 정보가 다시 환기됐다. 나는 한 6, 7년 전에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아마 김단야니 주세죽이니 하는 명성 자자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름들도 여기서 처음 봤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평전>을 덮자마자 서재의 책장에서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꺼내서 훑었다. 그때는 그냥 '과거의 전설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일을 했군..'하며 무협지 보듯 했던 내용들이 다시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김철수의 회고를 굉장히 재밌게 읽고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 파벌들에게 적대적인 관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우습게도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을때는 김철수의 반대파였던 화요파에 감정이입을 하며 책을 읽었다. 뭘 잘 모르니까 그때그때 이입을 대상을 찾아가며 페이지를 넘겼던 것이다. 이렇게 몇년전에 읽은 책까지 재독을 한 차례 하고나니 협소한 관점이 다소 극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순간 바로 이렇게 발전한 느낌이 들면 짜릿하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그 역사에 관심이 있되 나처럼 그다지 조예가 없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저자의 비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수많은 파벌과 인물이 다소 짧은 시간 안에 복잡하게 얼키고설키는 역사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내므로 그다지 읽기 어렵지 않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해서 이 주제에 관해 조금 더 본격적인 저술들을 읽는다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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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019년 최초로 완독한 책이다. 아마 이 책을 샀을때는 제목만 보고 별 생각 없이 샀던 거 같다. 책을 받았을 때, 그리고 또 이 책을 멜번으로 부칠 때 모두 '내가 왜 이런 책을 샀지' 하고 당혹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읽고싶은 종류의 책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나는 내가 이 책을 제목만 보고 산 이유를 쉬이 짐작하고 있다. 나 스스로가 어느정도 바이링구얼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굳이 '어느정도'라는 단서를 다는 이유는 내가 만 12세의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을땐 벌써 이미 한국어가 너무나 견고하게 내 모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절반을 넘는 세월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았으면서도 한국어를 구사할 때 체감하는 자유도를 영어에서 느낀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영어로 꿈을 꾸며, 한국어로 논설문을 쓸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논술교육을 한국어로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쓰기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것은 언어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이중언어 작가>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지 않을 수가.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이 <이중언어 작가ㅡ근현대문학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원을 찾아서>라는 학술회의 원고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인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 책을 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의 주제는 내가 막연히 상상한 것과는 아주 멀었다. 2017년에 읽었던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는 제목만 보고 골랐는데도 운이 좋게 내가 읽고싶었던 내용(바이링구얼 화자의 고유한 인식과 경험)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처참히 실패했다 하겠다... 그렇다고 책 내용이 아주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학문으로써의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한 나로서는 이해에 다소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의 공저자들은 모두 문학 전공자들이다. 각각의 원고에서 저자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몇몇 이중언어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1장 이광수 (한국어/일본어)

2장 횔덜린 (독일어/그리스어)

3장 레싱(독일어)과 세노작 (터키어/독일어)

4장 새뮤얼 베케트 (영어/프랑스어)

5장 앗시아 제바르 (아랍어/프랑스어/베르베르어)

6장 아룬다티 로이 (말라얄람어/힌디어/영어)


흥미롭게도 2장과 4장은 (연구자가 영어 화자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필연적으로) 영어로 쓰여있다. 책의 컨셉에 맞춰 의도한 바도 어느정도 있겠지 싶다. 대체로 절반 정도는 재밌게 읽었지만 그다지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베케트 원고는 도저히 재밌게 읽을 수 없었다. 앗시아 제바르라는 내가 몰랐던 저자를 소개 받은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중근동 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타리크 알리의 소설들을 Verso 출판사가 세일할 때 무더기로 사다놨었는데, 그다지 속도가 붙지 않아서 때려쳤던 적이 있다. 픽션에 있어서는 여성작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서는 이 작가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회가 있다면 제바르의 책을 한 권 사보기로 결정.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번 독서의 가장 큰 교훈은 제목만 보고 책을 사면 안된다는 것, 그거 같다.

Posted by 松.

<루됭의 마귀들림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잡담과 서론

2012년 중순, 건강 문제로 휴학을 한 뒤 약 반년을 서울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꽤 많은 책을 샀고 또 읽었다. 이 책 역시 그 시기에 구매한 책 중 하나이다. 막상 한국에서 지내던 당시에는 이 책을 집어들지 않다가 멜버른에 돌아온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거의 완독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수녀원에서 일어난 마귀들림 사건이라는 서사의 특이성 자체에 집중하며 읽었던지라,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중간의 몇 챕터를 생략하고 마지막장을 읽고 말았다. 별 거 없었다. 이해당사자들의 동기고 전말이 아주 시시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저술의도가 사건 자체의 선정성/특이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볼때마다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며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가십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독서의 경험을 망치고 말았다는 죄책감.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뭐 이렇게 결벽증적으로 껄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있었나 싶은데, 어쨌든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여기에 적는다

 

좋게 해석하자면, 아마 그때의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떤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나의 지식과 이해력이 다소 부족했다고 막연히 느꼈기에 완독을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히 나의 식견이 깊어졌겠냐마는 다행히 지난 몇년간 이 책이 다루는 시대-17세기-의 분위기를 다소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지식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 특히 학부시절의 마지막 학기에 튜더-스튜어트 시기의 영국사를 수강한 것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공간적 배경이 다르다고는 하나 어쨌든 서유럽이라는 큰 틀에서 묶일 수 있는 인접국인데다가 비슷한 세계관, 환경, 사회적 갈등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들이니만큼 대강의 분위기 파악에는 도움이 되었다.

 

17세기

서문에서 세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를 위협하는 어떤 힘이 덮칠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고 있다가 사회의 긴장 상황을 틈타 잠입하는 것이다... 그 힘은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는데, 이때 이 장치와 통로는 어떤 '불안'을 위해 사용된다... 그 힘은 울타리를 부수고 사회의 배수로를 범람하고 길을 뚫는다나중에 물이 빠지면 그 길 끝에는 다른 풍경, 다른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이는 이질적 요소의 침입인가 아니면 어떤 과거의 반복인가? 역사가는 결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이런 돌연한 팽창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화들이 되살아나서 이 이상한 것들의 압력에 대해 표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p 9)

굳이 위 문단을 인용한 것은 위 내용이 작가가 루됭의 마귀들림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세르토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유럽을 휩쓴 마녀/마귀들림 사건들이야말로 그 특정 시대가 갖고 있는 불안과 잠재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것은 교회와 법이라는 기존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여 사회적 불안을 잠재우는 동시에 단기적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복무하나 결과적으로는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이 끝났을 때 근대적 이성과 계몽으로 대표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종교와 교회권력의 영역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고 국가권력이 이를 대신한다.

 

끔찍한 혼종

작가의 말마따나, 서구 지성사에서 이성의 위치를 현저하게 격상시킨 데카르트의 <방법서설>1637년에 출간된다. 1789년에는 파리에서 바스티유가 함락된다. 그 사이의 150년 동안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들은 이성에 대해 종교에 대해 과학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인가


이 책의 분석을 수용한다면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은 17세기를 살아가는 유럽인들의 심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이다. 16329, 루됭시의 한 우르술라회 수녀원에서 마귀들림 사건이 발생한다. 수녀들은 환각을 보고 몸을 꼬고 신성모독적 언사를 내뱉으며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주술을 걸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수사관을 파견한다. 1011, 생피에르뒤마르셰 교회의 주임신부 위르벵 그랑디에가 문제의 술사로 지목된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깨나 알아주는 엘리트이자 달변가이다. 결국 지방판사, 관리, 법조인을 비롯한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나선다. 그러나 그랑디에는 지역사회와 고위성직자들과 나름의 커넥션을 가진 인물이고, 그간의 스캔들과 송사를 헤쳐나온 경험이 있다


결국 보르도의 대주교가 개입하여 체계적 조치를 요구한다. 수녀들은 격리되어 의사들의 검진을 받는다. 의학은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데, 왜냐면 17세기의 의학이란 것이 현대인의 눈에는 아주 우습기 그지없는 소극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찰과 연역이라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마귀들림 사건에 접근하는데, 이들 대다수는 바로 이 방법론을 통해 수녀들이 초자연적인 힘에 지배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결론은 이 사건에 동원된 의사들의 수식을 보면 그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진지한 과학자라고 생각하는지 절절이 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희극적이다. 17세기는 과학적 추론을 통해 악마와 주술에 도달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국가와 교회

결국 사건은 국왕의 명령으로 교회법원이 아닌 세속의 법원으로 이송된다. 어쨌든 (적어도 당시의 관점에서) 사건의 본질은 마귀들림 현상이기 때문에 구마의식은 재판 과정 내내 행해진다. 이 과정은 일종의 지역 명물이 되어 온갖 명사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된다. 재판 전후로 사건에 대한 출판물이 성행한다. 교회는 이를 즐기는 듯이 온갖 성유물과 신부를 동원해 쇼를 펼친다. 성유물을 갖다대고, 때리고, 심문하면 수녀들은 몸을 비틀고 난삽한 동작들을 취하고 경기한다. 이 모든 스펙터클은 대중들에게 교회의 언어와 권위를 재확인시키지만, 세르토가 분명히 지적하듯이 이 시기 이전의 구마의식은 이렇게까지 요란하지 않았다. 이전시기의 구마의식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신부가 몇 마디 말을 하면 끝나는 구조였(다고한). 이 마귀들림 사건이야말로 교회의 언어가 권위를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이 사건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 역시 -재상 리슐리외와 그의 지방관 로바르드몽으로 대표되는- 국가이성이며 최종판결을 내리는 것 역시 세속의 법원이다.  

 

총체적 서술에 대해

나는 이 사건에 대한 세르토의 분석 중 가장 큰 틀이 결국 근대이성의 출현과 교회로 대표되는 그 이전의 사회적 구조간의 갈등이라고 보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갈등의 축이 존재한다. 세르토는 서장에서 이미 루됭이 프랑스 내에서 신교와 구교간의 영적 전쟁의 최종전선에 해당하는 도시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도시에서 일어난 영적 스캔들은 결국 교회이건 국가이건 당대 권력자들의 이목을 끌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잘생기고 달변가였으나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주임신부 그랑디에는 이미 그전에도 여러번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 있었고,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주민인 그의 부모는 루됭의 지역사회 엘리트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분석은 사건의 핵심 중 하나인 수녀원장 장 데장주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방의 귀족 집안의 여러 딸들 중 하나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경미한 장애를 입었다. 그때문에 잔의 어머니는 그를 사교계와 결혼시장 대신 수녀원으로 보냈다. 어린시절의 짧은 수녀원 생활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다른 딸들에게는 화려한 옷을 입히면서 잔에게는 수수한 옷을 입히는 둥 그를 차별했다고 한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영민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나 결국 세속사회에서 별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루됭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특유의 영민함으로 인해 빠른 성공을 했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녀원장이 된다.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이 해결된 이후 잔은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살아있는 기적 취급을 받고 국왕 부처를 만나는 둥 유명세를 얻는다. 잔은 그러한 유명세를 주변인들의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즐긴다. 조서에서 한번 그녀는 그랑디에가 악마를 통해 자신에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녀의 개인적 성장배경은, 그랑디에와 데장주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지역 엘리트간들의 감정의 골은, 이 사건에 있어서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세르토가 서장에서 말했듯, 역사가가 어떤 사건 혹은 국면만을 분석하려고 목적해도 그러한 서술은 결국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가 말하듯, 어떤 것 하나를 파내고자 하면 결국 모든 것들이 감자덩이처럼 딸려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모든 감자덩이들을 다 요리해낸다고 해도 결국 조금 더 총체적인 분석이 나오는 것이지 총체적인 분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불가능성과 남아있는 빈 칸들이 결국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해 마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족

웃긴 포인트: 그랑디에는 생전에 <진리가 허식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분명히 이해될 수 있도록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고 꾸밈없는 추론으로 이끌어낸 명약관화한 근거와 권위에 의해 성직자가 결혼할 수 있음이 증명되는 독신에 대한 논고>라는 출판물을 썼는데 이거 제목이 너무 미사여구 많고 안 간결한 점이 웃김.


Posted by 松.

읽기에 앞서

이 리뷰를 어젯밤에 반 정도 열심히 쓰고 임시저장한 뒤 창을 닫았는데 오늘 보니 어쩐지 모르게 글이 날아가있다. 너무 허탈하고 화가 나서 짧게 감상을 쓰도록 하겠다..


책 바깥

지금까지 읽은 유제니디스의 작품은 모두 두권이다. <미들섹스>와 <처녀들 자살하다>가 그 두권인데, 둘 모두 7-80년대의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 없이는 즐기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작품이란 인상을 받았다. 다만 작가가 산문을 제법 아름답게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다소 답답함이 느껴지더라도 책장이 잘 넘어가긴 한다. 그나마 <미들섹스>가 <처녀들 자살하다>보다는 보편적인 테마를 많이 취하고 있는 편인데,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보다 꼭 더 좋은 작품이 되지는 않는 거 같다.


단평

뭐라뭐라 길게 써놓은걸 다 날리니 말 얹을 기운도 사라졌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어떤 스노비즘을 견딜수만 있다면 충분히 즐거운 독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스놉이다. 

Posted by 松.

책을 읽고나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다. 책이 너무 좋았다 그런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했다.  


책의 1장은 1688년에 출간된 한 책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에 살던 스페인계 유태인의 후손인 요세프 펜 소 데 라 베가가 쓴 <혼란 속의 혼란>이 그것인데,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흔히 '세계 최초의 주식투자 설명서'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영어권에서 대학을 다녔다보니 여기저기서 간략하게나마 영국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네덜란드'와 '1688'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지면 일단 떠오르는 게 있다. 그 해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네덜란드인인 오라녜공 빌럼이 영국의 왕이 되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이 있었던 해인 1602년 대신 1688년으로 1장을 시작하는데는 <혼란 속의 혼란>의 유명세에 대한 고려도 있었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세계사적 이벤트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잡설이 길었다. 나에게는 이 책이 제법 유용했다. 나는 사물을 이해할 때 그것이 현재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과정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다. 쉽게 말해서,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때 나는 족보부터 파악하고 보는 사람이다. 그게 내게는 제일 쉬운 방법이고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배울땐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나는 보통 사고실험이나 추상적인 사고를 귀찮아 하는 편인데, 만약 내가 그런것을 시도한다면 그것이 필요한 맥락과 이유에 설득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철학을 전공했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나는 나의 이런 지적 경향성을 설명할때 주로 내가 계약법을 배우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훗날 고대 로마법을 배우면서 해소되었는지 예시를 드는 편인데, 여기에 그걸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궁금한 사람 있으면 댓글 달거나 연락 주세요...


경제학을 공부한적도, 자산운용에 관심을 가져본적도 없는 나에게 증권이니 주식이니 하는 세계는 아무래도 낯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했듯 족보부터 시작하는 접근법을 애용하는 나에게 이 책은 증권시장의 탄생과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개념과 현상들에 대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원리는 이해하더라도,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거래되던 파생상품들이 현대의 그것들과 얼마나 흡사한지 알 길이 없다. 266페이지에서 한번 '환매 조건부 채권 매매'에 대해 설명하면서 리만 브라더스 사태의 원흉 중 하나인 '리포105'라는 금융상품을 예로 들어주긴 하는데, 이 부분을 제외하면 현대의 금융상품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주는 일은 없다. 물론 이는 헨드릭 데 카이저 거래소의 초창기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긴 하다. 


이 책은 아무래도 저자의 박사논문에 기반해 탄생한 듯 한데, 책의 말미에 실린 저자의 '연구 방법에 대한 해설' 부분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저자가 1차사료를 어떤 기준으로 획득하고 분류하고 사용했는지 대략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서는 대중교양서일수록 이러한 해설을 필수적으로 수록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분야 자체가 어떤 정서나 정당화 기제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수준 낮은 대중교양서들이 시장에 너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쨌든 전문적 역사가가 믿을만한 과정을 통해 얻은 이해와 성과에 기반해 쓰인 책이며,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있거나 부담 없이 읽을만한 역사서를 찾고 있다면 최소한 돈낭비는 아닐 것이다.


역자와 편집자의 노력이 책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점 또한 괜찮았다. 역자는 암스테르담 이곳저곳을 직접 다니며 사진자료를 실었고, 동시대 조선과 네덜란드간의 조우라던지 한반도에서 증권시장의 태동에 대한 서술이라던지 하는 부분들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문에서 언급된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증권시장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본문에 삽입된 하멜과 벨테브레이의 이야기는 다소 뜬금 없지 않았나 싶다. 굳이 무리하게 본문의 주제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는 와중에 (아무리 네덜란드인이 등장한다고 해도) 뜬금 없는 조선사 이야기가 나오니 아무래도 난삽한 느낌이었다. 그외에는 특별히 집중이 끊기는 부분 없이 읽었다.



Posted by 松.
생소한 분야를 접할 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가 바로 입문서를 고르는 일이다. 특히 그 분야의 전문가가 국내에 희소할 경우, 몇 안되는 번역서 중에 기중 나은 것을 골라야할때의 곤혹스러움은 나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메소아메리카의 문명과 고고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다루는 책을 읽어보기로 한데는 저자가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이 분야의 전공자라는 것이 한 몫 했다. 안그래도 낯선 분야에 대해 읽느라 고생하는데, 어색한 번역투 때문에 추가로 골머리를 썩힐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이 책이 적절한 입문서였느냐?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고 싶다. 최소한 저자의 문체는 제법 자연스러운 편이다. 사진자료가 풍부하게 쓰인 점도 주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내용의 배치와 책의 구조가 지금 형태가 최선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각 문명을 구성하는 장의 도입부에 그 문명의 창조신화를 삽입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독파하기 어렵더라도 일단 그 문명의 핵심적인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선취한 다음 다른 주제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바로 왕사(혹은 지배자의 계보)를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특히 첫 장인 마야문명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해당 문명의 사회상에 대한 설명 없이 기계적으로 누가 왕이 되고 다음 왕은 누구고 하는 반복적인 서술을 보고 있자니 진이 빠졌다. 이렇게 계보를 읊는데 덜 치중하고 저자의 전공분야인 고고학에 바탕을 두고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생활상과 세계관을 설명했으면 독자의 흥미를 잡아두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편집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 들자면 53페이지의 '14년의 재위 후에 그가 죽자 6세의 어린 동생인 아흐깔-모-납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형의 재위 시절에 후계자를 의미하는 '어린 왕자', 즉 촉이라고 불렸다. 아흐깔은 형을 이어 35세에 왕위에 올라 23년을 다스렸다' 같은 문장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전 문장에서 6세에 왕위에 오른 이가 다음 문장에서는 35세에 왕위에 올랐다니? 안그래도 낯선 고유명사들로 가득 찬 문장을 신경이 곤두서 읽고있을 독자에게 이러한 오류는 더욱더 큰 혼란을 준다. 이밖에도 몇몇 모호하거나 오자임이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으나 일일이 이곳에 적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신들의 시간>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전공한 한국어 모어 화자라는 저자의 장점을 이해하기 힘든 난삽한 구성과 포커스, 아쉬운 편집 등으로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특히 위에 이 책의 풍부한 사진자료에 대해 칭찬했는데, 문제는 이런 이미지들이 페이지에 비해 너무 작게 배치되거나 하여 디테일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단 것이다. 안그래도 생소한 문명의 낯선 도상을 다루는데 이미지를 잘 알아볼 수가 없다면 독자로서는 흥미가 다소 꺾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설명했듯 이 책에는 나름의 장점들이 뚜렷하다. 메소아메리카의 문명사와 고고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한국인 독자들에게 전하는데 애쓴 정혜주 선생님의 건승을 빌고, 또 다른 책으로 만날 일을 고대한다.


Posted by 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