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됭의 마귀들림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잡담과 서론

2012년 중순, 건강 문제로 휴학을 한 뒤 약 반년을 서울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꽤 많은 책을 샀고 또 읽었다. 이 책 역시 그 시기에 구매한 책 중 하나이다. 막상 한국에서 지내던 당시에는 이 책을 집어들지 않다가 멜버른에 돌아온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거의 완독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수녀원에서 일어난 마귀들림 사건이라는 서사의 특이성 자체에 집중하며 읽었던지라,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중간의 몇 챕터를 생략하고 마지막장을 읽고 말았다. 별 거 없었다. 이해당사자들의 동기고 전말이 아주 시시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저술의도가 사건 자체의 선정성/특이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볼때마다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며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가십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독서의 경험을 망치고 말았다는 죄책감.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뭐 이렇게 결벽증적으로 껄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있었나 싶은데, 어쨌든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여기에 적는다

 

좋게 해석하자면, 아마 그때의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떤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나의 지식과 이해력이 다소 부족했다고 막연히 느꼈기에 완독을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히 나의 식견이 깊어졌겠냐마는 다행히 지난 몇년간 이 책이 다루는 시대-17세기-의 분위기를 다소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지식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 특히 학부시절의 마지막 학기에 튜더-스튜어트 시기의 영국사를 수강한 것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공간적 배경이 다르다고는 하나 어쨌든 서유럽이라는 큰 틀에서 묶일 수 있는 인접국인데다가 비슷한 세계관, 환경, 사회적 갈등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들이니만큼 대강의 분위기 파악에는 도움이 되었다.

 

17세기

서문에서 세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를 위협하는 어떤 힘이 덮칠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고 있다가 사회의 긴장 상황을 틈타 잠입하는 것이다... 그 힘은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는데, 이때 이 장치와 통로는 어떤 '불안'을 위해 사용된다... 그 힘은 울타리를 부수고 사회의 배수로를 범람하고 길을 뚫는다나중에 물이 빠지면 그 길 끝에는 다른 풍경, 다른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이는 이질적 요소의 침입인가 아니면 어떤 과거의 반복인가? 역사가는 결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이런 돌연한 팽창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화들이 되살아나서 이 이상한 것들의 압력에 대해 표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p 9)

굳이 위 문단을 인용한 것은 위 내용이 작가가 루됭의 마귀들림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세르토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유럽을 휩쓴 마녀/마귀들림 사건들이야말로 그 특정 시대가 갖고 있는 불안과 잠재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것은 교회와 법이라는 기존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여 사회적 불안을 잠재우는 동시에 단기적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복무하나 결과적으로는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이 끝났을 때 근대적 이성과 계몽으로 대표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종교와 교회권력의 영역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고 국가권력이 이를 대신한다.

 

끔찍한 혼종

작가의 말마따나, 서구 지성사에서 이성의 위치를 현저하게 격상시킨 데카르트의 <방법서설>1637년에 출간된다. 1789년에는 파리에서 바스티유가 함락된다. 그 사이의 150년 동안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들은 이성에 대해 종교에 대해 과학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인가


이 책의 분석을 수용한다면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은 17세기를 살아가는 유럽인들의 심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이다. 16329, 루됭시의 한 우르술라회 수녀원에서 마귀들림 사건이 발생한다. 수녀들은 환각을 보고 몸을 꼬고 신성모독적 언사를 내뱉으며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주술을 걸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수사관을 파견한다. 1011, 생피에르뒤마르셰 교회의 주임신부 위르벵 그랑디에가 문제의 술사로 지목된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깨나 알아주는 엘리트이자 달변가이다. 결국 지방판사, 관리, 법조인을 비롯한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나선다. 그러나 그랑디에는 지역사회와 고위성직자들과 나름의 커넥션을 가진 인물이고, 그간의 스캔들과 송사를 헤쳐나온 경험이 있다


결국 보르도의 대주교가 개입하여 체계적 조치를 요구한다. 수녀들은 격리되어 의사들의 검진을 받는다. 의학은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데, 왜냐면 17세기의 의학이란 것이 현대인의 눈에는 아주 우습기 그지없는 소극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찰과 연역이라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마귀들림 사건에 접근하는데, 이들 대다수는 바로 이 방법론을 통해 수녀들이 초자연적인 힘에 지배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결론은 이 사건에 동원된 의사들의 수식을 보면 그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진지한 과학자라고 생각하는지 절절이 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희극적이다. 17세기는 과학적 추론을 통해 악마와 주술에 도달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국가와 교회

결국 사건은 국왕의 명령으로 교회법원이 아닌 세속의 법원으로 이송된다. 어쨌든 (적어도 당시의 관점에서) 사건의 본질은 마귀들림 현상이기 때문에 구마의식은 재판 과정 내내 행해진다. 이 과정은 일종의 지역 명물이 되어 온갖 명사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된다. 재판 전후로 사건에 대한 출판물이 성행한다. 교회는 이를 즐기는 듯이 온갖 성유물과 신부를 동원해 쇼를 펼친다. 성유물을 갖다대고, 때리고, 심문하면 수녀들은 몸을 비틀고 난삽한 동작들을 취하고 경기한다. 이 모든 스펙터클은 대중들에게 교회의 언어와 권위를 재확인시키지만, 세르토가 분명히 지적하듯이 이 시기 이전의 구마의식은 이렇게까지 요란하지 않았다. 이전시기의 구마의식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신부가 몇 마디 말을 하면 끝나는 구조였(다고한). 이 마귀들림 사건이야말로 교회의 언어가 권위를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이 사건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 역시 -재상 리슐리외와 그의 지방관 로바르드몽으로 대표되는- 국가이성이며 최종판결을 내리는 것 역시 세속의 법원이다.  

 

총체적 서술에 대해

나는 이 사건에 대한 세르토의 분석 중 가장 큰 틀이 결국 근대이성의 출현과 교회로 대표되는 그 이전의 사회적 구조간의 갈등이라고 보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갈등의 축이 존재한다. 세르토는 서장에서 이미 루됭이 프랑스 내에서 신교와 구교간의 영적 전쟁의 최종전선에 해당하는 도시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도시에서 일어난 영적 스캔들은 결국 교회이건 국가이건 당대 권력자들의 이목을 끌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잘생기고 달변가였으나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주임신부 그랑디에는 이미 그전에도 여러번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 있었고,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주민인 그의 부모는 루됭의 지역사회 엘리트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분석은 사건의 핵심 중 하나인 수녀원장 장 데장주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방의 귀족 집안의 여러 딸들 중 하나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경미한 장애를 입었다. 그때문에 잔의 어머니는 그를 사교계와 결혼시장 대신 수녀원으로 보냈다. 어린시절의 짧은 수녀원 생활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다른 딸들에게는 화려한 옷을 입히면서 잔에게는 수수한 옷을 입히는 둥 그를 차별했다고 한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영민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나 결국 세속사회에서 별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루됭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특유의 영민함으로 인해 빠른 성공을 했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녀원장이 된다.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이 해결된 이후 잔은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살아있는 기적 취급을 받고 국왕 부처를 만나는 둥 유명세를 얻는다. 잔은 그러한 유명세를 주변인들의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즐긴다. 조서에서 한번 그녀는 그랑디에가 악마를 통해 자신에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녀의 개인적 성장배경은, 그랑디에와 데장주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지역 엘리트간들의 감정의 골은, 이 사건에 있어서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세르토가 서장에서 말했듯, 역사가가 어떤 사건 혹은 국면만을 분석하려고 목적해도 그러한 서술은 결국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가 말하듯, 어떤 것 하나를 파내고자 하면 결국 모든 것들이 감자덩이처럼 딸려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모든 감자덩이들을 다 요리해낸다고 해도 결국 조금 더 총체적인 분석이 나오는 것이지 총체적인 분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불가능성과 남아있는 빈 칸들이 결국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해 마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족

웃긴 포인트: 그랑디에는 생전에 <진리가 허식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분명히 이해될 수 있도록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고 꾸밈없는 추론으로 이끌어낸 명약관화한 근거와 권위에 의해 성직자가 결혼할 수 있음이 증명되는 독신에 대한 논고>라는 출판물을 썼는데 이거 제목이 너무 미사여구 많고 안 간결한 점이 웃김.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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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다. 책이 너무 좋았다 그런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했다.  


책의 1장은 1688년에 출간된 한 책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에 살던 스페인계 유태인의 후손인 요세프 펜 소 데 라 베가가 쓴 <혼란 속의 혼란>이 그것인데,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흔히 '세계 최초의 주식투자 설명서'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영어권에서 대학을 다녔다보니 여기저기서 간략하게나마 영국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네덜란드'와 '1688'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지면 일단 떠오르는 게 있다. 그 해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네덜란드인인 오라녜공 빌럼이 영국의 왕이 되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이 있었던 해인 1602년 대신 1688년으로 1장을 시작하는데는 <혼란 속의 혼란>의 유명세에 대한 고려도 있었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세계사적 이벤트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잡설이 길었다. 나에게는 이 책이 제법 유용했다. 나는 사물을 이해할 때 그것이 현재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과정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다. 쉽게 말해서,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때 나는 족보부터 파악하고 보는 사람이다. 그게 내게는 제일 쉬운 방법이고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배울땐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나는 보통 사고실험이나 추상적인 사고를 귀찮아 하는 편인데, 만약 내가 그런것을 시도한다면 그것이 필요한 맥락과 이유에 설득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철학을 전공했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나는 나의 이런 지적 경향성을 설명할때 주로 내가 계약법을 배우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훗날 고대 로마법을 배우면서 해소되었는지 예시를 드는 편인데, 여기에 그걸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궁금한 사람 있으면 댓글 달거나 연락 주세요...


경제학을 공부한적도, 자산운용에 관심을 가져본적도 없는 나에게 증권이니 주식이니 하는 세계는 아무래도 낯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했듯 족보부터 시작하는 접근법을 애용하는 나에게 이 책은 증권시장의 탄생과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개념과 현상들에 대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원리는 이해하더라도,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거래되던 파생상품들이 현대의 그것들과 얼마나 흡사한지 알 길이 없다. 266페이지에서 한번 '환매 조건부 채권 매매'에 대해 설명하면서 리만 브라더스 사태의 원흉 중 하나인 '리포105'라는 금융상품을 예로 들어주긴 하는데, 이 부분을 제외하면 현대의 금융상품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주는 일은 없다. 물론 이는 헨드릭 데 카이저 거래소의 초창기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긴 하다. 


이 책은 아무래도 저자의 박사논문에 기반해 탄생한 듯 한데, 책의 말미에 실린 저자의 '연구 방법에 대한 해설' 부분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저자가 1차사료를 어떤 기준으로 획득하고 분류하고 사용했는지 대략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서는 대중교양서일수록 이러한 해설을 필수적으로 수록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분야 자체가 어떤 정서나 정당화 기제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수준 낮은 대중교양서들이 시장에 너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쨌든 전문적 역사가가 믿을만한 과정을 통해 얻은 이해와 성과에 기반해 쓰인 책이며,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있거나 부담 없이 읽을만한 역사서를 찾고 있다면 최소한 돈낭비는 아닐 것이다.


역자와 편집자의 노력이 책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점 또한 괜찮았다. 역자는 암스테르담 이곳저곳을 직접 다니며 사진자료를 실었고, 동시대 조선과 네덜란드간의 조우라던지 한반도에서 증권시장의 태동에 대한 서술이라던지 하는 부분들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문에서 언급된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증권시장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본문에 삽입된 하멜과 벨테브레이의 이야기는 다소 뜬금 없지 않았나 싶다. 굳이 무리하게 본문의 주제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는 와중에 (아무리 네덜란드인이 등장한다고 해도) 뜬금 없는 조선사 이야기가 나오니 아무래도 난삽한 느낌이었다. 그외에는 특별히 집중이 끊기는 부분 없이 읽었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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