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나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다. 책이 너무 좋았다 그런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했다.  


책의 1장은 1688년에 출간된 한 책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에 살던 스페인계 유태인의 후손인 요세프 펜 소 데 라 베가가 쓴 <혼란 속의 혼란>이 그것인데,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흔히 '세계 최초의 주식투자 설명서'로 통용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영어권에서 대학을 다녔다보니 여기저기서 간략하게나마 영국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네덜란드'와 '1688'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지면 일단 떠오르는 게 있다. 그 해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네덜란드인인 오라녜공 빌럼이 영국의 왕이 되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이 있었던 해인 1602년 대신 1688년으로 1장을 시작하는데는 <혼란 속의 혼란>의 유명세에 대한 고려도 있었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세계사적 이벤트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잡설이 길었다. 나에게는 이 책이 제법 유용했다. 나는 사물을 이해할 때 그것이 현재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과정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다. 쉽게 말해서,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때 나는 족보부터 파악하고 보는 사람이다. 그게 내게는 제일 쉬운 방법이고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배울땐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나는 보통 사고실험이나 추상적인 사고를 귀찮아 하는 편인데, 만약 내가 그런것을 시도한다면 그것이 필요한 맥락과 이유에 설득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철학을 전공했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나는 나의 이런 지적 경향성을 설명할때 주로 내가 계약법을 배우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훗날 고대 로마법을 배우면서 해소되었는지 예시를 드는 편인데, 여기에 그걸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궁금한 사람 있으면 댓글 달거나 연락 주세요...


경제학을 공부한적도, 자산운용에 관심을 가져본적도 없는 나에게 증권이니 주식이니 하는 세계는 아무래도 낯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했듯 족보부터 시작하는 접근법을 애용하는 나에게 이 책은 증권시장의 탄생과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개념과 현상들에 대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원리는 이해하더라도,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거래되던 파생상품들이 현대의 그것들과 얼마나 흡사한지 알 길이 없다. 266페이지에서 한번 '환매 조건부 채권 매매'에 대해 설명하면서 리만 브라더스 사태의 원흉 중 하나인 '리포105'라는 금융상품을 예로 들어주긴 하는데, 이 부분을 제외하면 현대의 금융상품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주는 일은 없다. 물론 이는 헨드릭 데 카이저 거래소의 초창기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긴 하다. 


이 책은 아무래도 저자의 박사논문에 기반해 탄생한 듯 한데, 책의 말미에 실린 저자의 '연구 방법에 대한 해설' 부분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저자가 1차사료를 어떤 기준으로 획득하고 분류하고 사용했는지 대략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서는 대중교양서일수록 이러한 해설을 필수적으로 수록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분야 자체가 어떤 정서나 정당화 기제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수준 낮은 대중교양서들이 시장에 너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쨌든 전문적 역사가가 믿을만한 과정을 통해 얻은 이해와 성과에 기반해 쓰인 책이며,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있거나 부담 없이 읽을만한 역사서를 찾고 있다면 최소한 돈낭비는 아닐 것이다.


역자와 편집자의 노력이 책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점 또한 괜찮았다. 역자는 암스테르담 이곳저곳을 직접 다니며 사진자료를 실었고, 동시대 조선과 네덜란드간의 조우라던지 한반도에서 증권시장의 태동에 대한 서술이라던지 하는 부분들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문에서 언급된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증권시장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본문에 삽입된 하멜과 벨테브레이의 이야기는 다소 뜬금 없지 않았나 싶다. 굳이 무리하게 본문의 주제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는 와중에 (아무리 네덜란드인이 등장한다고 해도) 뜬금 없는 조선사 이야기가 나오니 아무래도 난삽한 느낌이었다. 그외에는 특별히 집중이 끊기는 부분 없이 읽었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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