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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17 20191212 권헌익, 정병호 <North Korea: Beyond Charismatic Politics> 1

가장 최근에 완독한 책이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순으로 독후감을 쓰는 게 맞겠지만 천성이 게으르다보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만간 크리스마스 연휴이니 그때가 되면 짬이 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2012년 무렵에 권헌익의 <학살, 그 이후>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그때의 독서는 인류학이라는 분야 전반에 관심을 갖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인류학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막연하게 사학적 탐구의 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인식은 신화나 민담 따위의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의 기질과, 그런 기질로 인해 인류학과의 첫만남이 '민속학'이라는 용어를 통해서였다는 점에서 기인했을터이다. 어쨌든 그때의 독서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저자의 책을 더 읽고 싶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이 책이 나온지 얼마 안된 참이었기 때문에 그때 사다 놓고 여태 읽지 않은 것이다. 아예 안읽은 건 아니고, 한국학 수업 들을 때 학교 수업이나 과제 때문에 몇 번 들여다보긴 했지만.

 

우선 이 책이 왜 <극장국가 북한>이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넘어가고 싶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원제에 꽤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카리스마에 기반한 권력이 (한 비범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는, 카리스마라는 능력의 정의에 직접적으로 반하면서) 세습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두 저자는 극장국가라는 개념 외에도 여러가지 이론적 틀을 동원해서 이것이 어떻게 북한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극장국가라는 틀이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가족국가, 유격대국가라는 정의 이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극장국가 북한>이라는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틀린 기대를 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나에게는 이 책이 북한 체제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현존하는 이론적 틀을 여러모로 종합해서 북한 체제의 성격에 대해 통사적 결론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서론에서 지적하듯, 기본적으로 외국인에게 개방된 사회가 아닌 북한에서 전통적인 인류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협소한 수준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내가 평소에 읽어왔던 인류학 책들보다는 매우 건조하고, 이론적 분석에 기반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책은 주제의 심원함과 화제성과 별개로 상당히 분량이 짧은 편인데 (영문 기준 참고문헌 빼고 200 페이지가 채 안됨) 차라리 특정한 분석틀을 실증하는 사례들의 등장을 늘렸으면 덜 건조하게 읽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정도 편향된 샘플이긴 하지만 책에 자주 등장하는 탈북민들의 사례를 더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실존하는 북한 예술작품이나 선전물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유가 뭐가 됐건 예증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다. 나처럼 평소에 이 주제에 대해 범속한 수준의 관심만 있는 사람에게는 분량이 다소 늘더라도 사례의 등장을 늘리는 쪽이 이론적 적용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연구와 이론을 한데 엮어 소개하거나 그를 종합해 총체적 결론을 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건조하거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그런 인상을 받은 이유는, 이러한 이론적 분석이 저자들이 제시하는 중심 질문에 대해 가지는 효용성을 확인할 방도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격대국가건, 극장국가건, 가족국가건 다 좋다. 이러한 이론들은 북한의 지도층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어떤 서사를 창조하고 어떤 가치들을 내세웠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책이 제시하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처럼 베버를 읽어본 적도 없고 정치 이론에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는 입장에서는 '카리스마의 세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것만 해도 의미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질문에 충분한 답변이 제공되었는지의 여부로 다시 돌아가보자.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라는 난제의 성격이 무엇이었고 북한 지도층이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을 제공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이 베버의 말대로 근본적으로 모순을 배태한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라면) 그것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북한 체제는 대체 어떻게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을 '가능케' 했는가라는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이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해 반쪽짜리 설명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굳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북한 체제가 권력의 세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이론을 창조해내고, 대중을 교육하는 동시에 이들을 선동/선전예술에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사실을 어지간한 한국인 독자는 모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식은 굳이 한국인 독자가 아닌 평소 북한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영어권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한 체제가 직조해낸 국가적 서사와 가치체계, 그리고 이러한 대중 동원적 프로젝트들이 독재정권의 3대 세습이라는 전무후무한 성취를 가능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인지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실 내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외부인들에게는 다소 유치하고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런 수단들이 -그 체제가 제시하는 이론과 서사들이 어떤 내재적 견고함을 갖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일 재밌었던 부분과 위에 서술한 나의 불만족스러움은 정확하게 맞닿아있다. 김일성의 죽음과 그에 대한 북한 사회의 반응/대응에 대해 다룬 첫번째 챕터는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 중 하나인데, 왜냐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북한 사회라는 것이 단일하고 균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사례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대국상'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김일성 사망 발표가 국경지방의 한 학교에서 일으킨 다소 절제된 반응과 전쟁영웅 출신의 교장이 있던 다른 학교 사이에서 나타난 격렬한 반응의 온도차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례를 접한 독자는 그렇다면 북한 체제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서로 다른 사회적/지리적 배경을 지닌 집단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카리스마의 세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있어서는, 북한 지도층이 어떤 수단을 생각해내고 동원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반쪽짜리 답변일 뿐이다.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했는데, 그 수단들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라는 서술은 현상에 대한 묘사에 그칠 뿐이지 그것이 왜 가능했는지를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나는, 그 수단들이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1인칭적 경험에 대한 서술 없이는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이러한 수용자적 입장에서의 1인칭적 경험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기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것은 알고 있지만서도, 앞서 등장한 사례와 유사한 사례들이 더 많이 등장하거나 혹은 더욱 면밀한 분석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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