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오랜 팬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20년을 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다. 9월 중순에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3부의 3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1, 2, 3권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3부 연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들었는데, 1권만 사서 읽으면 너무 감질날 것 같아서 여태 참고 있다가 그나마 세권이면 좀 성이 찰 것 같아 이제사 3부를 구해 읽은 것이다. 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하려 카드를 꺼내는데, 그렇게 손에 들어온 세권을 몽땅 읽어버리면 너무 허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알라딘 웹사이트 한구석에 떠있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추천하고 어쩌고.. 스탠더드한 광고문구였지만 어쨌든 델 토로가 추천했다는 것도 그렇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인 것도 그렇고, 마술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룬의 아이들>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의 세계 속에 잠겨있고 싶다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포스팅의 주제가 될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기존에 사고싶었던 책들은 너무 비쌌다...).
물건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면서 나는 <룬의 아이들>의 3부를 개시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 주문은 평소보다 약간 늦게 도착했다. 뭐 시절이 하 수상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나를 며칠간 약간 불행하게 했지만 그만큼 <룬의 아이들>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만큼 빨리 읽혔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 받은 책들을 나는 이틀만에 게걸스럽게 완독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나는 이럴 줄 알고 또 다른 이야기책을 준비했지!
황당하지만 이것이 내가 뭐 마술적 리얼리즘의 비조이자 라틴 아메리카 단편문학의 거장 어쩌구이신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을 읽게 된 계기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단편집이라면 나는 고등학교때 아옌데의 <The Stories of Eva Luna>를 읽은 것 외에는 지식이 일천하다. 그외에는 전부 중장편 소설이었는데, 픽션을 평소에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 그것 역시 탐독한 양이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어느정도 애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유럽/북미의 현대문학에 큰 흥미를 못느끼는데, 아무래도 픽션에 대한 취향이 어릴때 엄마/언니가 읽던 한국의 여성 소설가들 (박완서, 이경자, 박경리, 공선옥 등) 책을 보며 형성되어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읽은 양이 많지는 않지만 동유럽 문학,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현대사로 인해 PTSD를 겪게 된 작가들이 똑같이 PTSD를 겪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다루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20세기 한국 여성문학과 공유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픽션에 대한 기호가 정서적으로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은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 위주로 형성되어가지고 이것은 first world problem’이로군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집중이 안된다는 얘기다. 블로그에 자세히 쓰진 않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었을 때도 대체로 이런 감상이었다.
키로가의 이야기들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나의 기대(위에 서술한대로 현대사... PTSD.. 치유적 글쓰기.. 어쩌구 저쩌구...)에 아주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시대적/세대적 측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키로가가 1878년생에 2차대전이 터지기 전에 죽었으니 사실 이 사람은 완전 20세기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좀 무리가 있다. 저자소개에서 말하듯 키로가가 ‘중남미 환상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라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이 분야가 완전히 성숙하기 이전 세대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소재나 떠오르는 심상은 그간 내가 읽어온 라틴 아메리카 문학과 비슷하되 이야기의 전개나 서술방식등은 포나 메리 셸리의 19세기 영어권 고딕 단편문학들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중남미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구세계적 전통의 부재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닌만큼 이런 기시감은 자연스러울텐데, 어쨌든 나는 이런 중간적인 느낌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내가 그동안 중남미 문학을 읽으면서 좋다고 느꼈던 것들을 상당히 부당하게 이 책에도 기대했던 것 같다.
이 단편집 전반에 대해 미지근한 느낌을 받은 것과 별개로, <목 잘린 닭>은 굉장히 힘 있는 단편이었다. 이것도 사실 소재나 플롯 자체는 여러번 변주되어온 테마일 것이다. 결말이 하나로 예비되어있는 소재를 가지고 독자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은 좋은 스토리텔러만이 가진 기술이고, 그렇기에 누구나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업이 되는 것이겠지 (이렇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쓰고 있자니 죄책감이 드는군요). 그외에는 <가시철조망>이나 <야구아이> 정도가 좋았다.
(동물이 최고다)
수미쌍관을 위해 <룬의 아이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그 세계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 블로그를 만든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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