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계급 정체성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난하게 컸던 우리 엄마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공순이가 되고 싶었다거나 학교를 안 다니고 돈을 벌러 다니고 싶었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한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로서야 그 시절 엄마의 고민이 각박한 경제상황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어릴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뭐랄까,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평생 중간계급의 생을 영위해온 나로서는 노동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수치스럽고 한심한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은 중간계급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대학원에까지 진학한 교양인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애경로를 밟은 사람이 저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는 당장 쥐꼬리만한 돈을 벌기 위해 훗날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게 자명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순이(!)'가 되겠다는 명예롭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생각을 우리 엄마가 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다시피 어린 시절의 나는 빈곤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공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의 말에 과거의 내가 가진 적의와 거부감이 오히려 당혹스럽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중간계급의 아이가 가진 전형적인 노동/가난혐오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여공’과 ‘문학’을 합친 여공문학이라는 조어가 강렬한 대비를 품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두 단어가 어떤 계급과 결부되어 있는지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학 내부에서도 물론 다양한 시도가 존재해왔지만, 그것의 생산자와 향유층이 대체로 어느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교육수준이 있는 계층에 속해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의 전통에서 노동계급에 속하는 인물상인 여공은 꽤나 인기 있는 주인공이었다. 굳이 순문학적 전통에서 탈피하려고 시도한 장르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박완서 같은 기성작가 역시 여공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을 여럿 발표했으며, 90년대의 후일담 문학은 말할 것도 없다. 문학적 아이템으로써 여공이 가진 인기는 고속성장 시기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에서는 어느정도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그들이 수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그들의 기여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이 필연적으로 중간계급적 정체성과 강하게 결부된 매체라면, 그것은 애초에 노동계급, 더 나아가 여공이라는 주체를 상상하고 재현하기에 적합한 매체인가? 여공문학은 과연 여공들이 누구였는지 재현하는데 성공했는가? 물론 나는 엄마의 10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상상력이 부족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쩌면 예술적 상상력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재현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공문학>에 나타난 분석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이러한 장르적 한계에 봉착해 있었으며, 이러한 태생적 모순이 극복되는 과정이야말로 여공문학이라는 장르의 발전과 역사를 관통하는 테마인 동시에 한국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강력한 시사점이 되고 있다.

저자는 여공문학의 전성기를 크게 식민지 시기인 1920-30년대와 해방 후 산업화 시기인 1970-1990년대로 구분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 두 시기의 여공문학 사이의 연속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식민지 시기의 여공문학은 주로 카프에 속했거나 Sympathizer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던 좌익계통의 작가들에 의해 주로 생산 되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에서 카프니 월북작가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단절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식민지 시기 여공문학의 특징은 (저자에 의하면 강경애의 <인간문제>정도를 제외하고는) 근대적 산업화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철저한 희생양, 그리고 노동계급 남성에 의한 계몽과 구조를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단순히 여성 노동계급의 주체성 혹은 정치적 가능성을 외면한다는 것 이상으로 문제적인데, 이들이 재현한 여공의 서사는 여공들이 실제로 처한 폭력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이해는 특히 공장에서 자행되던 성폭력에 대한 묘사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묘사하는 성폭력은 그저 신체적 약자에 대한 강제적 섹스로 그려지며 이것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여러 취약성을 강조하여 독자의 정념을 끌어내는 장치로 이용되는 데 그친다. 이 좌익 성향의 작가들이 실제로 가진 선의와는 별개로 2-30년대의 여공문학은 작업장 내 성적 위계의 역학과 여공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면적인 이해만을 보이는데 그친다. 저자는 이 시기의 여공문학에서 유일하게 강경애를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난 작가로 꼽는데, 그 이유는 강경애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성폭력이 가지고 있는 도구적이고 공모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 선비가 지주에게 겁탈을 당한 뒤 ‘아들을 낳아 그 집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가 되는 것과 그 집을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p 126)’ 장면이 그렇고 한 여공이 간난이 몰래 감독의 숙직실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그렇다.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일들로 말미암아,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관계는 지속적으로 애매해지고, 증명 불가능하며, 공모적인 것이 되며, 언제든 쉽게 발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강경애 정도를 제외하면 1920-30년대의 여공문학의 성취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듯 하다. 이는 어느정도는 당대의 경제적, 문화적 요소와 연관이 있는데, 이를테면 ‘하층계급 여성들의 높은 문맹률과 그들을 녹초로 만드는 공장 노동이 독서 자체를 불가능한 취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43)’. 그 시절의 여공들은 문학 내부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알 길조차 없었으며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할지에 대해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온정적이고 평면적인 이해는 여공들 스스로가 여러가지 조건(문해력, 최소한의 경제력 등)을 갖추고 작가되기를 시도할 때에서야 어느정도 극복된다.

그렇다면 7-80년대의 여공문학은 단순히 서술주체가 바뀌었다는 것 이외에 어떤 질적 성취를 이뤄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저자는 그 답을 논하기 전에 고속성장 시절 독재정부가 전통적 유교 가부장주의 내부의 젠더 위계질서를 어떤 식으로 산업화 시대에 적용했으며 여러 진영에서 어떤 이미지가 여공들에게 강요되고 있었는지를 짚고 넘어감과 동시에 여공들이 시대의 불평등과 폭력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여성이며 동시에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한 복잡한 억압기제, 몇가지 예를 들자면 빈곤이라는 어려움과 동시에 전통적으로 여성이 바깥일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의 노동하는 여성이 가지는 낙인, 동일방직 사태에서 드러나듯 적극적으로 여성 노동계급을 탄압하는데 가담하기까지 하는 남성 노동계급과의 경쟁 등 다면적이고 뿌리 깊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2-30년대의 여공문학과 여공들이 스스로 작가되기를 실현했던 7-80년대 여공문학의 사이에는 바로 여성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의 복잡다단성을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여공 개인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전하는데 성공했다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러한 텍스트로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그리고 여공문학이 이룬 성취의 어떤 정점으로 신경숙의 <외딴 방>을 거론하는데, 개별의 텍스트에 대한 자세한 비평을 여기 적지는 않겠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조선과 산업화 시기 한국 내부의 여공문학에 한정되어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미권의 산업소설 내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그에 대한 비평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공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결국 책 전반에 걸쳐 더욱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의 여공문학은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중간계급 여성이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바로 그 역사적 순간에 근대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경구가 옳다면, 여성 노동계급의 글쓰기가 근대성, 자본주의 그리고 우리 자신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p 17)

이상으로 2019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을 마친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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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완독한 책이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순으로 독후감을 쓰는 게 맞겠지만 천성이 게으르다보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만간 크리스마스 연휴이니 그때가 되면 짬이 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2012년 무렵에 권헌익의 <학살, 그 이후>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그때의 독서는 인류학이라는 분야 전반에 관심을 갖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인류학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막연하게 사학적 탐구의 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인식은 신화나 민담 따위의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의 기질과, 그런 기질로 인해 인류학과의 첫만남이 '민속학'이라는 용어를 통해서였다는 점에서 기인했을터이다. 어쨌든 그때의 독서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저자의 책을 더 읽고 싶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이 책이 나온지 얼마 안된 참이었기 때문에 그때 사다 놓고 여태 읽지 않은 것이다. 아예 안읽은 건 아니고, 한국학 수업 들을 때 학교 수업이나 과제 때문에 몇 번 들여다보긴 했지만.

 

우선 이 책이 왜 <극장국가 북한>이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넘어가고 싶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원제에 꽤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카리스마에 기반한 권력이 (한 비범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는, 카리스마라는 능력의 정의에 직접적으로 반하면서) 세습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두 저자는 극장국가라는 개념 외에도 여러가지 이론적 틀을 동원해서 이것이 어떻게 북한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극장국가라는 틀이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가족국가, 유격대국가라는 정의 이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극장국가 북한>이라는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틀린 기대를 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나에게는 이 책이 북한 체제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현존하는 이론적 틀을 여러모로 종합해서 북한 체제의 성격에 대해 통사적 결론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서론에서 지적하듯, 기본적으로 외국인에게 개방된 사회가 아닌 북한에서 전통적인 인류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협소한 수준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내가 평소에 읽어왔던 인류학 책들보다는 매우 건조하고, 이론적 분석에 기반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책은 주제의 심원함과 화제성과 별개로 상당히 분량이 짧은 편인데 (영문 기준 참고문헌 빼고 200 페이지가 채 안됨) 차라리 특정한 분석틀을 실증하는 사례들의 등장을 늘렸으면 덜 건조하게 읽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정도 편향된 샘플이긴 하지만 책에 자주 등장하는 탈북민들의 사례를 더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실존하는 북한 예술작품이나 선전물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유가 뭐가 됐건 예증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다. 나처럼 평소에 이 주제에 대해 범속한 수준의 관심만 있는 사람에게는 분량이 다소 늘더라도 사례의 등장을 늘리는 쪽이 이론적 적용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연구와 이론을 한데 엮어 소개하거나 그를 종합해 총체적 결론을 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건조하거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그런 인상을 받은 이유는, 이러한 이론적 분석이 저자들이 제시하는 중심 질문에 대해 가지는 효용성을 확인할 방도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격대국가건, 극장국가건, 가족국가건 다 좋다. 이러한 이론들은 북한의 지도층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어떤 서사를 창조하고 어떤 가치들을 내세웠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책이 제시하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처럼 베버를 읽어본 적도 없고 정치 이론에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는 입장에서는 '카리스마의 세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것만 해도 의미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질문에 충분한 답변이 제공되었는지의 여부로 다시 돌아가보자.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라는 난제의 성격이 무엇이었고 북한 지도층이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을 제공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이 베버의 말대로 근본적으로 모순을 배태한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라면) 그것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북한 체제는 대체 어떻게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을 '가능케' 했는가라는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이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해 반쪽짜리 설명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굳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북한 체제가 권력의 세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이론을 창조해내고, 대중을 교육하는 동시에 이들을 선동/선전예술에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사실을 어지간한 한국인 독자는 모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식은 굳이 한국인 독자가 아닌 평소 북한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영어권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한 체제가 직조해낸 국가적 서사와 가치체계, 그리고 이러한 대중 동원적 프로젝트들이 독재정권의 3대 세습이라는 전무후무한 성취를 가능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인지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실 내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외부인들에게는 다소 유치하고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런 수단들이 -그 체제가 제시하는 이론과 서사들이 어떤 내재적 견고함을 갖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일 재밌었던 부분과 위에 서술한 나의 불만족스러움은 정확하게 맞닿아있다. 김일성의 죽음과 그에 대한 북한 사회의 반응/대응에 대해 다룬 첫번째 챕터는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 중 하나인데, 왜냐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북한 사회라는 것이 단일하고 균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사례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대국상'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김일성 사망 발표가 국경지방의 한 학교에서 일으킨 다소 절제된 반응과 전쟁영웅 출신의 교장이 있던 다른 학교 사이에서 나타난 격렬한 반응의 온도차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례를 접한 독자는 그렇다면 북한 체제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서로 다른 사회적/지리적 배경을 지닌 집단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카리스마의 세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있어서는, 북한 지도층이 어떤 수단을 생각해내고 동원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반쪽짜리 답변일 뿐이다.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했는데, 그 수단들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라는 서술은 현상에 대한 묘사에 그칠 뿐이지 그것이 왜 가능했는지를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나는, 그 수단들이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1인칭적 경험에 대한 서술 없이는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이러한 수용자적 입장에서의 1인칭적 경험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기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것은 알고 있지만서도, 앞서 등장한 사례와 유사한 사례들이 더 많이 등장하거나 혹은 더욱 면밀한 분석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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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 독후감(https://dayori.tistory.com/28)에서 말했듯, 테마가 있는 독서를 하기 위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다룬 책을 골라 읽었다. 이 책은 2015년쯤 한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때려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공산당 평전>을 통해 식민지 시기 진보진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대강의 타임라인을 숙지하고 읽어가니 확실히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대단한 연구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긴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전설처럼 회자되던 '현앨리스'라는 개인의 삶이 이제서야 구체적으로 밝혀졌다는 점이 다소 놀랍다. 나 또한 과거에 현앨리스를 '조선의 마타하리'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팜므파탈로 묘사한 뉴스기사 따위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병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궤적에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다.


물론 연구자의 노력을 통해 새로 조명을 받은 사료들이 상당하겠지만, 참고문헌과 주석의 분량을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료 자체의 양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흔적을 남기고 때때로 자신 또한 몇 편의 글을 남겼던 사람의 삶이 단순히 박헌영의 숙청과 관련된 맥락에서 '여간첩' 따위로 납작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우면서도 서글프다. 다만 상당수의 사료가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납득이 된다. 이 책을 통해 밝혀진 현앨리스의 삶의 궤적은 미주 각지 - 한반도 - 상해 - 일본 - 체코 등을 넘나드는데, 이러한 사실을 찾아내고 또 현지에 남은 각각의 사료를 발굴해 활용하는 걸 보면 가히 혀가 내둘러진다.     


평소 국민이라는 틀에 잘 맞지 않는 생애를 살아온 개인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경계인과 세계인이라는 말이 동의어는 아니겠으나, 이런 개인들은 대체로 경계인과 세계인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현앨리스 또한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보다는 훨씬 경계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와이에서 출생하여 경성과 상하이, 일본, 러시아, 뉴욕, LA, 체코 등 세계각국에서 활동한 독보적인 이력만을 보면 누구보다도 세계인에 가까워보이지만, 그렇게 활동의 장을 여러번 바꿔야했던 필요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인'이라는 말이 가진 낙관적인 어감을 쉽게 들이댈 수 없다. 저자가 책의 시작과 끝에서 강조하듯이, 현앨리스의 삶을 지배하는 관성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세례였다. '그녀는 3·1 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 운동의 후기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앨리스 본인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는지와는 무관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일견 강요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의 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세계인보다는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어울린다. 마침 이 책의 부제는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다.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매력적인 문장이다. 문장의 명료함과는 별개로, 저자의 이 말이 일반론적으로, 혹은 사학자의 통찰로써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Big History가 대세라고도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즐겨읽었던 많은 역사책들은 그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떠돌다 불혹이 넘어 사상적 조국을 찾아 조선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처형된 현앨리스의 삶과,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반도의 빨갱이들에 매혹되는 나를 보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 있어 그 말은 사실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추신

책을 읽고나서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미국 공산당사, 하와이의 정치사에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이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사료들을 직접 참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혹시 좋은 연구서를 아는 분이 있다면 추천 바람. 굽신굽신.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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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은 '평전'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논하며 시작한다. 저자의 요지는 간단하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각도에서도 과연 '평전'이라는 제목이 적합한가 의문부호가 그려졌다. 어떤 '평'을 담고있기에는 책의 분량이 다소 짧았다. 책의 서술은 조선공산당을 둘러싼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는데 집중한다. 물론 한 명도 아닌 다수의 개인을 포함하는 집단을 다룬 평론을 하려면 그것은 엄청난 연구서가 되어야 할 것이므로 나의 이런 지적은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다. 막상 책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면, 이 책에 <조선공산당 평전> 이상의 다른 더 적절한 제목도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비교적 어릴 때 빨간 물이 들었지만 청소년기-청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나로서는 한국의 사상사와 운동사에 접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획득할 수 있었다. 거의 술자리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빨갱이'로 정체화한지 10년이 지난 이제는 막연한 빨갱이 정서와 친근감을 갖고 있을 뿐, 어디 가서 왼쪽에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애매하고 파편화된 지식을 갖고 살아오던 찰나, 이렇게 누군가 정연하게 시간순으로 엮은 텍스트를 보니 많은 것이 새로 보이고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지금까지 이런 기초적인 배경도 모르고 개화기 사회주의자들을 다룬 책들을 뒤적거렸으니 그동안 배운 게 없지, 실소가 나왔다. 이 다음 책으로는 전에 반쯤 읽고 때려치운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아는 게 좀 있으니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서 많은 정보가 다시 환기됐다. 나는 한 6, 7년 전에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아마 김단야니 주세죽이니 하는 명성 자자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름들도 여기서 처음 봤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평전>을 덮자마자 서재의 책장에서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꺼내서 훑었다. 그때는 그냥 '과거의 전설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일을 했군..'하며 무협지 보듯 했던 내용들이 다시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김철수의 회고를 굉장히 재밌게 읽고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 파벌들에게 적대적인 관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우습게도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을때는 김철수의 반대파였던 화요파에 감정이입을 하며 책을 읽었다. 뭘 잘 모르니까 그때그때 이입을 대상을 찾아가며 페이지를 넘겼던 것이다. 이렇게 몇년전에 읽은 책까지 재독을 한 차례 하고나니 협소한 관점이 다소 극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순간 바로 이렇게 발전한 느낌이 들면 짜릿하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그 역사에 관심이 있되 나처럼 그다지 조예가 없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저자의 비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수많은 파벌과 인물이 다소 짧은 시간 안에 복잡하게 얼키고설키는 역사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내므로 그다지 읽기 어렵지 않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해서 이 주제에 관해 조금 더 본격적인 저술들을 읽는다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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