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오랜 팬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20년을 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다. 9월 중순에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3부의 3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1, 2, 3권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3부 연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들었는데, 1권만 사서 읽으면 너무 감질날 것 같아서 여태 참고 있다가 그나마 세권이면 좀 성이 찰 것 같아 이제사 3부를 구해 읽은 것이다. 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하려 카드를 꺼내는데, 그렇게 손에 들어온 세권을 몽땅 읽어버리면 너무 허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알라딘 웹사이트 한구석에 떠있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추천하고 어쩌고.. 스탠더드한 광고문구였지만 어쨌든 델 토로가 추천했다는 것도 그렇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인 것도 그렇고, 마술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룬의 아이들>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의 세계 속에 잠겨있고 싶다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포스팅의 주제가 될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기존에 사고싶었던 책들은 너무 비쌌다...).

물건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면서 나는 <룬의 아이들>의 3부를 개시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 주문은 평소보다 약간 늦게 도착했다. 뭐 시절이 하 수상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나를 며칠간 약간 불행하게 했지만 그만큼 <룬의 아이들>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만큼 빨리 읽혔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 받은 책들을 나는 이틀만에 게걸스럽게 완독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나는 이럴 줄 알고 또 다른 이야기책을 준비했지!

황당하지만 이것이 내가 뭐 마술적 리얼리즘의 비조이자 라틴 아메리카 단편문학의 거장 어쩌구이신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을 읽게 된 계기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단편집이라면 나는 고등학교때 아옌데의 <The Stories of Eva Luna>를 읽은 것 외에는 지식이 일천하다. 그외에는 전부 중장편 소설이었는데, 픽션을 평소에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 그것 역시 탐독한 양이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어느정도 애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유럽/북미의 현대문학에 큰 흥미를 못느끼는데, 아무래도 픽션에 대한 취향이 어릴때 엄마/언니가 읽던 한국의 여성 소설가들 (박완서, 이경자, 박경리, 공선옥 등) 책을 보며 형성되어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읽은 양이 많지는 않지만 동유럽 문학,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현대사로 인해 PTSD를 겪게 된 작가들이 똑같이 PTSD를 겪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다루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20세기 한국 여성문학과 공유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픽션에 대한 기호가 정서적으로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은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 위주로 형성되어가지고 이것은 first world problem’이로군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집중이 안된다는 얘기다. 블로그에 자세히 쓰진 않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었을 때도 대체로 이런 감상이었다.

키로가의 이야기들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나의 기대(위에 서술한대로 현대사... PTSD.. 치유적 글쓰기.. 어쩌구 저쩌구...)에 아주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시대적/세대적 측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키로가가 1878년생에 2차대전이 터지기 전에 죽었으니 사실 이 사람은 완전 20세기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좀 무리가 있다. 저자소개에서 말하듯 키로가가 ‘중남미 환상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라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이 분야가 완전히 성숙하기 이전 세대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소재나 떠오르는 심상은 그간 내가 읽어온 라틴 아메리카 문학과 비슷하되 이야기의 전개나 서술방식등은 포나 메리 셸리의 19세기 영어권 고딕 단편문학들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중남미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구세계적 전통의 부재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닌만큼 이런 기시감은 자연스러울텐데, 어쨌든 나는 이런 중간적인 느낌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내가 그동안 중남미 문학을 읽으면서 좋다고 느꼈던 것들을 상당히 부당하게 이 책에도 기대했던 것 같다.

이 단편집 전반에 대해 미지근한 느낌을 받은 것과 별개로, <목 잘린 닭>은 굉장히 힘 있는 단편이었다. 이것도 사실 소재나 플롯 자체는 여러번 변주되어온 테마일 것이다. 결말이 하나로 예비되어있는 소재를 가지고 독자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은 좋은 스토리텔러만이 가진 기술이고, 그렇기에 누구나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업이 되는 것이겠지 (이렇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쓰고 있자니 죄책감이 드는군요). 그외에는 <가시철조망>이나 <야구아이> 정도가 좋았다.

(동물이 최고다)

수미쌍관을 위해 <룬의 아이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그 세계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 블로그를 만든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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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20년의 첫 주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는 아직도 작년 중순에 읽은 책들에 대한 독후감도 다 쓰지 못했다. 덕분에 묘한 죄책감에 휩싸여 이 포스트를 쓴다. 직장을 안다니면 독후감을 꾸준히 쓰겠지 싶어 그간 읽은 책들을 바리바리 싸서 고향집에 내려왔는데, 이래서는 괜히 힘만 쓴 꼴이다. 오해 마시라, 직장을 때려친 게 아니라 연말연초를 맞아 휴가 쓴 것에 불과하니...

 

우선 이 책이 청사에 대해 지식과 이해가 일천한 독자를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제목만 보고 얼핏 문화사에 대한 내용이나 인류학적인 서술이 들어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다기보다는 한국인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청나라가 어떤 국가였고 어떤 점에서 다른 전근대 중국 왕조와 구별되는지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제공하는 입문서에 가까웠다. '키메라'라는 희랍어 어원의 단어에는 어떤 괴이쩍고 심원한 어감이 있지만, 이 책의 경우 이 단어는 정말 청나라라는 국가가 구성된 다민족적이고 다원적인 방식을 묘사하는 직설적인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비유가 직설적이고 단순한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혹시 나처럼 이상한 기대를 품을 사람이 생길까봐 여기 적어둔다.  

 

책을 완독하고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배웠다고 생각하는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청나라 사회가 팔기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것과 청이라는 국가의 성격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중화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청나라 황실은 청말까지 몽골의 칭기스칸 일족과 지속적인 혼인관계를 맺었고 몽골-티베트 세계의 지배적 종교였던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의 보호자를 자처하였다. 저자는 청 왕조가 평균적인 한국 독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한화漢化하지 않았으며 중화와 초원 세계 양쪽 모두를 경영하기 위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다원적 체제를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저자가 말하듯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청의 대러시아 외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청 황실이 러시아와의 외교를 광의의 '몽골 문제'로 인지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접촉에 있어서 한인 관료는 철저하게 배제되며 그들 사이의 조약 역시 만주어와 러시아어 텍스트가 존재할 뿐 굳이 한문으로 작성되지 않는다. 청 황실의 공식 외교문서가 한문으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화 왕조로써의 청에 더 익숙했던 독자라면 상당히 충격적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저자에 따르면 몽골-티벳 세계에 속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한인 관료가 '순례권'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사실 공문서가 한문으로 작성되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말을 얹기가 어려운 주제이지만 저자는 청나라의 대조선 외교 역시 한인 관료의 순례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외에 청과 현대 중국 사이의 연속성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서도 인상적인 통찰이 있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청 황실이 타파해야할 전근대적/봉건적 존재로 인식됨과 동시에 근대화에 대한 열망은 한족을 중심으로한 내셔널리즘과 강력히 결부되어 나타나곤 했다. 그렇다면 한족 내셔널리즘에 기반해 건국된 현대 중국이 과연 애초에 다민족적/다원적 정체성을 전제로 조직된 제국이었던 청의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과거 청 제국의 일부였던 티벳과 위구르의 현재에서 보듯이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로 보인다. 

 

아쉬운 점 하나를 적자면 이 책을 통해서는 청이라는 국가가 팔기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개략적인 정보 이상의 것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팔기라는 집단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능했으며 각 집단간에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었고 어떤 기에 속해있다는 것이 개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한 서술이 있었으면 아마 청이라는 사회가 어떤 곳이었는지 독자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조선과 조선인이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책의 도입부부터가 병자호란으로 시작하는만큼, 이 주제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는 나같은 한국인 독자에게는 청사에 대한 괜찮은 입문서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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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계급 정체성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난하게 컸던 우리 엄마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공순이가 되고 싶었다거나 학교를 안 다니고 돈을 벌러 다니고 싶었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한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로서야 그 시절 엄마의 고민이 각박한 경제상황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어릴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뭐랄까,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평생 중간계급의 생을 영위해온 나로서는 노동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수치스럽고 한심한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은 중간계급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대학원에까지 진학한 교양인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애경로를 밟은 사람이 저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는 당장 쥐꼬리만한 돈을 벌기 위해 훗날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게 자명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순이(!)'가 되겠다는 명예롭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생각을 우리 엄마가 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다시피 어린 시절의 나는 빈곤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공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의 말에 과거의 내가 가진 적의와 거부감이 오히려 당혹스럽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중간계급의 아이가 가진 전형적인 노동/가난혐오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여공’과 ‘문학’을 합친 여공문학이라는 조어가 강렬한 대비를 품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두 단어가 어떤 계급과 결부되어 있는지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학 내부에서도 물론 다양한 시도가 존재해왔지만, 그것의 생산자와 향유층이 대체로 어느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교육수준이 있는 계층에 속해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의 전통에서 노동계급에 속하는 인물상인 여공은 꽤나 인기 있는 주인공이었다. 굳이 순문학적 전통에서 탈피하려고 시도한 장르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박완서 같은 기성작가 역시 여공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을 여럿 발표했으며, 90년대의 후일담 문학은 말할 것도 없다. 문학적 아이템으로써 여공이 가진 인기는 고속성장 시기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에서는 어느정도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그들이 수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그들의 기여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이 필연적으로 중간계급적 정체성과 강하게 결부된 매체라면, 그것은 애초에 노동계급, 더 나아가 여공이라는 주체를 상상하고 재현하기에 적합한 매체인가? 여공문학은 과연 여공들이 누구였는지 재현하는데 성공했는가? 물론 나는 엄마의 10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상상력이 부족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쩌면 예술적 상상력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재현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공문학>에 나타난 분석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이러한 장르적 한계에 봉착해 있었으며, 이러한 태생적 모순이 극복되는 과정이야말로 여공문학이라는 장르의 발전과 역사를 관통하는 테마인 동시에 한국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강력한 시사점이 되고 있다.

저자는 여공문학의 전성기를 크게 식민지 시기인 1920-30년대와 해방 후 산업화 시기인 1970-1990년대로 구분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 두 시기의 여공문학 사이의 연속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식민지 시기의 여공문학은 주로 카프에 속했거나 Sympathizer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던 좌익계통의 작가들에 의해 주로 생산 되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에서 카프니 월북작가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단절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식민지 시기 여공문학의 특징은 (저자에 의하면 강경애의 <인간문제>정도를 제외하고는) 근대적 산업화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철저한 희생양, 그리고 노동계급 남성에 의한 계몽과 구조를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단순히 여성 노동계급의 주체성 혹은 정치적 가능성을 외면한다는 것 이상으로 문제적인데, 이들이 재현한 여공의 서사는 여공들이 실제로 처한 폭력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이해는 특히 공장에서 자행되던 성폭력에 대한 묘사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묘사하는 성폭력은 그저 신체적 약자에 대한 강제적 섹스로 그려지며 이것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여러 취약성을 강조하여 독자의 정념을 끌어내는 장치로 이용되는 데 그친다. 이 좌익 성향의 작가들이 실제로 가진 선의와는 별개로 2-30년대의 여공문학은 작업장 내 성적 위계의 역학과 여공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면적인 이해만을 보이는데 그친다. 저자는 이 시기의 여공문학에서 유일하게 강경애를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난 작가로 꼽는데, 그 이유는 강경애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성폭력이 가지고 있는 도구적이고 공모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 선비가 지주에게 겁탈을 당한 뒤 ‘아들을 낳아 그 집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가 되는 것과 그 집을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p 126)’ 장면이 그렇고 한 여공이 간난이 몰래 감독의 숙직실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그렇다.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일들로 말미암아,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관계는 지속적으로 애매해지고, 증명 불가능하며, 공모적인 것이 되며, 언제든 쉽게 발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강경애 정도를 제외하면 1920-30년대의 여공문학의 성취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듯 하다. 이는 어느정도는 당대의 경제적, 문화적 요소와 연관이 있는데, 이를테면 ‘하층계급 여성들의 높은 문맹률과 그들을 녹초로 만드는 공장 노동이 독서 자체를 불가능한 취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43)’. 그 시절의 여공들은 문학 내부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알 길조차 없었으며 자신들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할지에 대해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온정적이고 평면적인 이해는 여공들 스스로가 여러가지 조건(문해력, 최소한의 경제력 등)을 갖추고 작가되기를 시도할 때에서야 어느정도 극복된다.

그렇다면 7-80년대의 여공문학은 단순히 서술주체가 바뀌었다는 것 이외에 어떤 질적 성취를 이뤄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저자는 그 답을 논하기 전에 고속성장 시절 독재정부가 전통적 유교 가부장주의 내부의 젠더 위계질서를 어떤 식으로 산업화 시대에 적용했으며 여러 진영에서 어떤 이미지가 여공들에게 강요되고 있었는지를 짚고 넘어감과 동시에 여공들이 시대의 불평등과 폭력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여성이며 동시에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한 복잡한 억압기제, 몇가지 예를 들자면 빈곤이라는 어려움과 동시에 전통적으로 여성이 바깥일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의 노동하는 여성이 가지는 낙인, 동일방직 사태에서 드러나듯 적극적으로 여성 노동계급을 탄압하는데 가담하기까지 하는 남성 노동계급과의 경쟁 등 다면적이고 뿌리 깊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2-30년대의 여공문학과 여공들이 스스로 작가되기를 실현했던 7-80년대 여공문학의 사이에는 바로 여성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의 복잡다단성을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여공 개인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전하는데 성공했다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러한 텍스트로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그리고 여공문학이 이룬 성취의 어떤 정점으로 신경숙의 <외딴 방>을 거론하는데, 개별의 텍스트에 대한 자세한 비평을 여기 적지는 않겠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조선과 산업화 시기 한국 내부의 여공문학에 한정되어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미권의 산업소설 내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그에 대한 비평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공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결국 책 전반에 걸쳐 더욱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의 여공문학은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중간계급 여성이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바로 그 역사적 순간에 근대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경구가 옳다면, 여성 노동계급의 글쓰기가 근대성, 자본주의 그리고 우리 자신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p 17)

이상으로 2019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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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완독한 책이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순으로 독후감을 쓰는 게 맞겠지만 천성이 게으르다보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만간 크리스마스 연휴이니 그때가 되면 짬이 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2012년 무렵에 권헌익의 <학살, 그 이후>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그때의 독서는 인류학이라는 분야 전반에 관심을 갖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인류학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막연하게 사학적 탐구의 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인식은 신화나 민담 따위의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의 기질과, 그런 기질로 인해 인류학과의 첫만남이 '민속학'이라는 용어를 통해서였다는 점에서 기인했을터이다. 어쨌든 그때의 독서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저자의 책을 더 읽고 싶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이 책이 나온지 얼마 안된 참이었기 때문에 그때 사다 놓고 여태 읽지 않은 것이다. 아예 안읽은 건 아니고, 한국학 수업 들을 때 학교 수업이나 과제 때문에 몇 번 들여다보긴 했지만.

 

우선 이 책이 왜 <극장국가 북한>이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넘어가고 싶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원제에 꽤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카리스마에 기반한 권력이 (한 비범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는, 카리스마라는 능력의 정의에 직접적으로 반하면서) 세습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두 저자는 극장국가라는 개념 외에도 여러가지 이론적 틀을 동원해서 이것이 어떻게 북한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극장국가라는 틀이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가족국가, 유격대국가라는 정의 이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극장국가 북한>이라는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틀린 기대를 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나에게는 이 책이 북한 체제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현존하는 이론적 틀을 여러모로 종합해서 북한 체제의 성격에 대해 통사적 결론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서론에서 지적하듯, 기본적으로 외국인에게 개방된 사회가 아닌 북한에서 전통적인 인류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협소한 수준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내가 평소에 읽어왔던 인류학 책들보다는 매우 건조하고, 이론적 분석에 기반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책은 주제의 심원함과 화제성과 별개로 상당히 분량이 짧은 편인데 (영문 기준 참고문헌 빼고 200 페이지가 채 안됨) 차라리 특정한 분석틀을 실증하는 사례들의 등장을 늘렸으면 덜 건조하게 읽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정도 편향된 샘플이긴 하지만 책에 자주 등장하는 탈북민들의 사례를 더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실존하는 북한 예술작품이나 선전물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유가 뭐가 됐건 예증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다. 나처럼 평소에 이 주제에 대해 범속한 수준의 관심만 있는 사람에게는 분량이 다소 늘더라도 사례의 등장을 늘리는 쪽이 이론적 적용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연구와 이론을 한데 엮어 소개하거나 그를 종합해 총체적 결론을 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건조하거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그런 인상을 받은 이유는, 이러한 이론적 분석이 저자들이 제시하는 중심 질문에 대해 가지는 효용성을 확인할 방도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격대국가건, 극장국가건, 가족국가건 다 좋다. 이러한 이론들은 북한의 지도층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어떤 서사를 창조하고 어떤 가치들을 내세웠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책이 제시하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처럼 베버를 읽어본 적도 없고 정치 이론에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는 입장에서는 '카리스마의 세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것만 해도 의미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질문에 충분한 답변이 제공되었는지의 여부로 다시 돌아가보자.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라는 난제의 성격이 무엇이었고 북한 지도층이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을 제공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이 베버의 말대로 근본적으로 모순을 배태한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라면) 그것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북한 체제는 대체 어떻게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을 '가능케' 했는가라는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이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해 반쪽짜리 설명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굳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북한 체제가 권력의 세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이론을 창조해내고, 대중을 교육하는 동시에 이들을 선동/선전예술에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사실을 어지간한 한국인 독자는 모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식은 굳이 한국인 독자가 아닌 평소 북한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영어권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한 체제가 직조해낸 국가적 서사와 가치체계, 그리고 이러한 대중 동원적 프로젝트들이 독재정권의 3대 세습이라는 전무후무한 성취를 가능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인지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실 내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외부인들에게는 다소 유치하고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런 수단들이 -그 체제가 제시하는 이론과 서사들이 어떤 내재적 견고함을 갖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일 재밌었던 부분과 위에 서술한 나의 불만족스러움은 정확하게 맞닿아있다. 김일성의 죽음과 그에 대한 북한 사회의 반응/대응에 대해 다룬 첫번째 챕터는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 중 하나인데, 왜냐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북한 사회라는 것이 단일하고 균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사례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대국상'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김일성 사망 발표가 국경지방의 한 학교에서 일으킨 다소 절제된 반응과 전쟁영웅 출신의 교장이 있던 다른 학교 사이에서 나타난 격렬한 반응의 온도차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례를 접한 독자는 그렇다면 북한 체제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서로 다른 사회적/지리적 배경을 지닌 집단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카리스마의 세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있어서는, 북한 지도층이 어떤 수단을 생각해내고 동원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반쪽짜리 답변일 뿐이다.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했는데, 그 수단들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라는 서술은 현상에 대한 묘사에 그칠 뿐이지 그것이 왜 가능했는지를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나는, 그 수단들이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1인칭적 경험에 대한 서술 없이는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이러한 수용자적 입장에서의 1인칭적 경험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기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것은 알고 있지만서도, 앞서 등장한 사례와 유사한 사례들이 더 많이 등장하거나 혹은 더욱 면밀한 분석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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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제목의 날짜가 저렇게 생긴 이유는 9월중 핸드폰이 고장나면서 2018년 7월과 2019년 9월 사이의 데이터를 몽땅 유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이 책을 9월중에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튼 올해의 9월과 10월은 너무 다사다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으므로 날짜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둔다.

 

이 책을 산 이유는 전적으로 둔황이라는 제목 때문이다. 나는 전근대사를 읽을 때 코스모폴리턴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기와 지역에 강하게 매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둔황 같은 곳에는 환장할 수 밖에 없다. 일문학에 일천하므로 이노우에 야스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가 이 책에 적힌 약력을 보고 <풍도>의 작가임을 알았다. <풍도>는 나도 들어본 바가 있지... 역덕이니깐...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몇 안되는 여성 인물들의 역할은 실로 기계적으로, 그들의 역할은 남성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끌어내는 데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남성 인물의 심경의 변화나 중요한 행동을 추동하는데 복무한 다음 바로 사라져버린다. 내가 무신경한건지 비위가 좋은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솔직히 희극적이라고 생각했다. 둔황, 그리고 11세기라는 키워드들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에 기대어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책의 재미가 이 이야기가 쓰인 시대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다. 눈에 띄게 문학적으로 아름답거나 엄청난 통찰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이지 1959년에나 쓰일 법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고, 아마도 내 감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1959년에나 쓰일 법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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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사를 해서 너무 정신이 없었다. 6월 8일에 올린 <조선의 퀴어> 독후감에 이사를 한지 얼마 안됐다고 썼는데, 6개월만에 또 이사를 한것이다. 남의 집에 산다는 게 뭐 좀 그렇다. 그나마 이번 집은 1년 계약이니 좀 낫길 바란다... 슬픈 사회초년생의 삶... 사야되는 것은 너무 많고 돈은 없다... 그나마 인터넷은 (이미 이사한지 3주가 넘게 지난 시점에서) 신청해놨으므로 다음주부터는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여러모로 바빴다고 해서 포스팅이 없던 세 달 내내 독서를 하지 않은 건 아닌데, 진득하게 앉아서 뭘 곱씹고 쓰고 할 시간은 없었다. 독서야 틈틈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뭘 한 문단이라도 쓰는 건 적지 않은 단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최근의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너무 귀했고, 그런 시간이 있다면 보통 만화일기를 그린다던가 낙서를 하는데 썼다. 뭔가를 그리는 건 어쨌든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나의 정신건강을 고려한다면 그쪽이 우선순위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상한쪽으로 정리벽이 있는 나의 성격상 독후감을 쓰겠다고 블로그를 만들어놓고 독후감을 안쓰는 것도 모종의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커피테이블에 그간 읽은 책들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독후감을 써보도록 한다 (아, 도대체 나는 어쩌다 이런 정신병자가 된 것일까?).

 

로버트 단턴의 책은 이번에 두번째로 읽은 것이다. 2012년 혹은 2013년도쯤에 <책과 혁명>을 읽다가 말았고, 그외에는 사학과 수업을 기웃기웃하며 이것저것 발췌독할 기회가 있었다. 우습게도 제일 중요한 저작 취급 받는 <고양이 대학살>은 읽지 않았다. 

 

프랑스혁명기를 다룬 책이지만 프랑스 혁명을 다룬 다른 책들보다는 과거에 포스팅한 <루됭의 마귀들림>이 더 자주 떠올랐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콩도르세가 루됭 사건을 언급하는 인용문이 등장하기도 해서, 루됭 사건이 프랑스사에서는 꽤 임팩트 있는 에피소드로 남았다는 사실을 부차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와 루됭 사건 사이에는 1세기 하고도 반이 넘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어쨌든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과 인간 정신이 표현되는 역사적 양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책 사이에는 프랑스사라는 큰 틀을 넘어서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 작은 책에는 한 가지 커다란 목적이 있다. 바로 혁명 전야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프랑스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검토하는 일이다. 곧 프랑스혁명으로 관심의 초점에서 밀려나기 전 프랑스인들이 보던 대로 그 세계를 보려는 것이다. (p 19)"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의 모습은 <루됭의 마귀들림>의 그것보다는 익숙할 수 밖에 없다. 메스머주의는 단순하게 말해 18세기 후반 유럽 사회에서 성행한 일종의 사이비 과학이다. 메스머주의는 어쨌든 당대에 유행한 과학적/계몽주의적 사고방식과 언어적 틀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사회구성원 일반의 존중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거친 비유이지만 한국인이라면 한의학을 떠올리면 되고, 서구적 예로는 homeopathy나 chiropractic 따위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메스머주의의 열렬한 추종자들의 리스트에 라파예트니 데물랭이니 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이름이 올라가있다는 것이 처음엔 황당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사실 잠시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은 현대에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범속함에도 불구하고, 왜 메스머주의는 한때 성공한 사이비 과학 이상의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첫번째로, 동어반복적이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이야기한대로 '프랑스인들이 보던 대로 그 세계를 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 시기에 유행한 모든 것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썼지만) 기만적인 이유인데, 사실 진지한 사람이라면 1 대 1로 무언가를 복원하고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메스머주의가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의 성공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건/현상에 관해 시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그 사건은 물론 대혁명이다):

 

"그 당시 프랑스인들은 메스머주의가 자연에 대해, 자연의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에 대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는 힘들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 그들이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사고방식 중에서 메스머주의는 중요한 한 항목이 되었다. 이런 유산 속에서 메스머주의의 위치가 결코 인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세계관의 원천이 된 것들 가운데 불순하고 유사과학적인 것들에 대해 한층 더 까다로웠던 이후 세대들이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동안 메스머가 누린 인상적인 지위를 애써 잊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pp 20-21)"

 

아이러니컬하게도 메스머주의는 그것이 사이비과학으로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속성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의 시선을 끈다. 메스머주의의 주창자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는 빈 의과대학 출신의 의학박사로서, 일단 관련 분야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력 정도는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루됭의 마귀들림>에 나타나는 의사들도 그렇지만, 19세기 중반 이전의 의사들이 과연 그들이 갖고있는 권위에 비례해 믿을만한 존재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자). 그는  <동물자기론>이라는 이론을 주창한 뒤 프랑스 곳곳에 이 이론을 응용한 치료소를 열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이론과 행보는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지만 주류의학계의 환영은 얻지 못한다. 당대의 많은 개혁적 지식인들은 이러한 메스머주의와 주류의학계의 불화를 주류의학계의 이해타산과 이기심에서 연원한 것으로 해석했다. 당대에 만연했던 이러한 이해를 통해 메스머주의는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 독자에게 당시 프랑스 사회의 광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NL... 개량한복, 기치료, 수지침, 이런 키워드로 환원되고 만다....

 

어쨌든 진보들은 이래서 안된다 진보는 멍청이들이다 이런 결론을 내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 것은 아니고 (내가 진보임), 그냥 뭐 세상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메스머주의라는 사이비과학의 일종이 유행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용적으로 그것이 어떠했던 간에 그것이 이성적이고 계몽적인 외피를 쓰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 처럼 당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메스머주의의 옹호자들은 메스머주의의 이론적 틀과 조직을 사용해 혁명에 참여했고 (이 과정은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있음), 더욱 철저하게 근대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세계를 완성하는데 있어 기여를 했다. 그러나 훗날 현대인들이 재구성한 역사에서 그들은 '유사과학적'이고 '불순'하기 때문에 종종 탈락되고야 만다. 물론 이런 탈락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단순히 메스머주의라는 이론 자체가 발전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유의미한 정보값과 맥락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스머주의는 당대인들의 지적 세계의 강력한 표현 -특히 메스머주의를 향한 추종이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사건을 가능케 한 에너지와 겹친다는 점에서- 으로써 진지한 검토와 평가를 필요로 한다. 

 

세상이 이렇게 모순적입니다 여러분! 물론 뭐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좀 오바고 사실 메스머주의 자체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었을수도 있지만, 어쨌든 저자가 '18세기 사람들이 루소나 몽테스키외를 읽고 혁명을 한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야설을 엄청 봐서 혁명을 했네요..' 이걸 막 표로 보여주고 이래갖고 유명해진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이거 중요했다고 하면 중요했겠지 뭐... 여튼 서로 너무 미워하고 살지 맙시다! 급마무리 is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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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 말한대로 리스의 다른 단편집을 읽었다. 아쉽게도 이 단편집에서는 <The Day They Burned the Books>이 준 즐거움을 능가하는 단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표제작인 <La Grosse Fifi>가 좋았다.

 

지난번에 읽은 단편집에서는 단편들 사이에 큰 공통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책의 경우는 단편들끼리의 분위기가 대동소이하다. 지난 포스팅에서 진 리스가 1890년생인걸 알고 깜짝 놀랐다고 썼는데, 이 단편집은 그녀가 세대적으로 어느 시대에 속한 사람인지 이해가 되는 단편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만큼 전형적인 이야기들이다. 1차 대전, 호텔을 전전하는 유럽인들과 그 주변에 생성되는 지골로, 운전기사, 메이드들의 생태계, 뭐 이런것들. 너무 흔한 소품들이고 캐릭터들이어서 사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Vienne> 같은 경우는 어쩐지 캐서린 맨스필드 생각이 났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거장이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맨스필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2땐지 고3땐지 문학 과목의 교과과정에 맨스필드가 들어가있었는데, 고작해야 단편들 몇 개 읽는 것에 불과함에도 나에겐 꽤 고역이었다. 다행히 이 경우는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그 정도로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진 리스의 문체는 여전히 직설적이고 페이스가 빠르기 때문에 책장은 빨리 넘어갔지만 다소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The Day They Burned the Books>를 너무 좋아했어서 생긴 기대감 때문이다. <Mixing Cocktails>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기대한 비유럽적이고 주변부적인 정서는 찾기 어려웠다. 결국 진 리스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단편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구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엔 적어도 호텔에 사는 유럽인 얘기는 안나오겠지.

 

이 단편집에서 내가 제일 별로라고 생각한 <Vienne>의 경우 별로인 것 뿐만 아니라 분량이 제일 길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 전체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묘사 또한 이 단편에 들어있다. 이 단편에 대한 나의 불호와는 별개로 이 부분은 상당히 탁월하다고 생각해 여기에 발췌해둔다. 이 발췌는 화자가 돈이 다 떨어지는 상황에 대해 상상하는 심리묘사의 일부인데, 가난한 상태에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모멸감이 어떻게 솟아날 수 밖에 없는지를 마지막 한 문장으로 너무 직관적으로 묘사해 가슴이 아플 정도다(ㅠㅠ):


Not to be poor again. No and No and No.

...

I can still do this and this. I can still clutch at that or that.

So-and-So will help me.

....

I can't go down, I won't go down. Help me, help me!

Steady - I must be clever. So-and-So will help.

But So-and-So smiles a worldly smile.

you get nervous. He doesn't understand, I'll make him -

But So-and-So's eyes grow cold. You plead.

Can't you help me, won't you, please? It's like this and this -

So-and-So becomes uncomfortable; obstinate.

No good.

I musn't cry, I won't cy.

And that time you don't. You manage to keep your head up, a smile on your face.

So-and-So is vastly relieved. So relieved that he offers at once the little help that is a mockery, and the consolong compliment. 

In the taxi still you don't cry.

You've thought of someone else.

But at the fifth or sixth disappointment you cry more easily.

After the tenth you give it up. You are broken - no nerves left.

And every second-rate fool can have their cheap little triumph over you - judge you with their little middle-class judgement. 

 

여튼 수중에 갖고 있는 진 리스의 책들을 모두 읽었으므로 1) 다음 포스팅은 다른 사람이 쓴 책에 대해서 쓰게 될 것이고2)<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언제 눈에 띄면 사서 읽기로 하며 이만 포스팅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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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나있다. 거의 다 쓴 포스팅을 한번 다 날려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나 빨리 대충 쓸거다... 그리고 순서대로라면 로버트 단턴의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에 대해 먼저 써야되지만 그건 꽤 오래 걸릴거고 지금은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일단 이것부터 빨리 쓰도록 한다...

1. 진 리스가 1890년생인걸 알고 매우 깜짝 놀람. 왜냐면 문체가 굉장히 속도감있고 구어체에 가까움. 주제도 대체로 주변부나 여성의 경험에 관한 것이라 더욱 현대적으로 느껴짐.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쓰고나서 얼마 안가서 죽었음.

2. 카슨 매컬러스 단편집보다 이게 훨씬 재밌었음. 나는 역시 1세계인의 심상에 별로 관심이 없는듯... 오랜만에 책장이 절로 넘어가는 독서를 함.

3. 리서치를 해보니까 표제작인 Till September Petronella는 아마 자전적인 이야기임. 작가가 코러스걸 생활을 꽤 오래 했다함. 책을 다 읽고 거기서 그냥 끝내버리면 모르게 되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실감함 .

3. 가장 좋았던 단편은 표제작이 아니라 The Day They Burned the Books인데 이 부분에 대해 또 쓰려고 하니 화가 난다. 비서구인이 서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억압적이면서 동시에 해방적인 미묘한 관계를 짧은 단편으로 명료하게 나타냄. 내가 좋아하는 소품이나 캐릭터(인물로서가 아닌 장치로써) 많이 나옴.

주인공들은 이주민의 자손이거나 혼혈이라서 본토에서 태어나 이주한 '진짜 영국인'들에 비해서 차별 받고 실질적 억압을 경험함. 백인 아버지가 흑인 어머니를 일상적으로 모욕하고 구타하는 환경은 이러한 억압의 한 예이고 또 동시에 이 모든 불합리적 상황에 대한 비유임. 그리고 백인 아버지는 본토에서 값비싼 책들을 자꾸 주문하는데, 여기엔 향수병과 속물교양에 대한 추구가 둘 다 동기로 작용함. 흑인 어머니는 이 책들을 증오할 수 밖에 없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아이는 독서 통해 위안과 도피처를 얻음. 그러나 그의 백인 아버지가 이 책들을 향수병을 달래는 용도로 사모았단 사실에서 드러나듯 사실 이 책들의 물리적 출처뿐만 아니라 이들이 제공하는 세계 또한 결국 유럽, 좁게는 영국의 그것에 기반해 있음. 이 책들은 그러므로 양가적 존재임. 백인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책들을 불태우는 것을 복수이자 탈출구로 선택할 수 있지만 아이는 그럴 수 없음. 그럴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인해 고통 받음. 주인공들은 결국 어머니의 손에서 무작위로 두 권의 책을 구해내는데 성공함. 이 책들이 무엇이었는지 여기 적으면 너무나 뻔한 아이러니처럼 들리기 때문에 적지 않겠음. 이 결말을 이야기를 읽을땐 굉장하다고 느꼈는데, 내 손으로 적으니 너무 평범해보인다. 그만큼 이야기가 몰입감이 있음. 

4. 나머지 단편들도 평이하게 재밌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Jean Rhys의 또 다른 단편집을 읽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이 작가의 책을 하나도 읽지 않은 주제에 책을 두 권이나 이미 샀던 것이다... 펭귄의 상술 때문에 이렇게 사놓고 몇년째 안읽은 단편집들이 집에 30권은 있는 것 같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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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순서대로라면 <슬픈 열대> 포스팅을 마무리하고 <역사가의 시간>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해야한다. 하지만 이 책들을 완독한 게 어느덧 머나먼 6월의 일이므로 약간의 복습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그냥 오늘 읽은 책에 대해 쓰기로 한다.

 

이 책은 펭귄의 'Penguin Modern' 시리즈의 45번째 단편집이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펭귄 Modern Classic 시리즈와 헷갈리면 안된다. 일단 표지가 전자의 경우 옥색이고 후자의 경우 회색과 흰색의 구성이기 때문에 막상 책을 실물로 접하면 그 둘이 다른 기획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Penguin Modern은 Modern Classic보다 훨씬 사악한 기획이다. Penguin Modern의 경우 각각의 책들의 부피가 엄청 작기 때문에 그만큼 싸고, 그렇기 때문에 서점에서 아무 생각없이 몇권씩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서점들은 이 책들을 카운터에 진열해놓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나처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결국 돈은 돈대로 낭비하고 한정된 책장의 공간마저 낭비하게 된다. 

 

이 책은 아마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Middlesex>를 구입할 때 같이 샀을 것이다. 멜버른의 Avenue라는 프랜차이즈 서점인데, 동네서점치고는 꽤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쨌든 예의 서점 카운터에도 역시 Penguin Modern 시리즈가 비치되어 있었고 나는 별 생각없이 아는 이름을 보고 이 책을 구매했다. 약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문학작품을 구매할 때 보통 별 생각없이 제목을 보고 꽂히면 그걸 산다. 카슨 매컬러스의 경우도 그렇게 아무 배경지식 없이 Wunderkind라는 단편의 제목이 좋아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은 Modern Classic 시리즈의 일부였다) 충동구매를 한 후 알게된 작가다.

 

그 작품은 내가 그런 식으로 대충 읽은 많은 단편들 중 그나마 잊히지 않고 뇌리에 어떤 인상을 남겼다. 그 책을 읽고 매컬러스에 대한 나름의 리서치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그의 작품을 더 읽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에 어쨌든 이 자에게 'The Heart is a Lonely Hunter'라는 대표작이 있고, 미국 남부 사람이고, 일찍 죽었고, 어려서는 음악을 했고, 정신질환이 있었다는 대강의 지식은 갖게 되었다. 

 

카슨 매컬러스는 장르적으로는 Southern Gothic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사실 나는 미국문학에 큰 애정이 있지는 않기 때문에 매컬러스가 이 규정에 얼마나 정확히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서던 고딕으로 분류되는 작가 중에는 그나마 코맥 맥카시나 테네시 윌리엄스가 익숙한 이름들인데, 주관적으로 그들이 같은 장르로 묶일 정도로 비슷하게 느껴지냐면 역시 잘 모르겠다. 전혀 공통점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냥 미국인 작가들이 미국인 얘기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정도 이상의 유사성은 잘 느끼지 못했다. 이 장르의 정의가 그냥 미국 남부인들의 생활을 핍진성 있게 묘사하는 소설을 일컫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장르적 구분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나는 카슨 매컬러스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생활인들의 이야기만을 하면서도 (강한 생활감은 아무래도 미국문학 전반에서 느껴지는 특징인 것 같다)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멜랑콜릭한것이 상당히 생소하고 유별나게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세 편의 경우 첫번째는 엄마가 유산을 겪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온 경험을 한 소년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프랑스에서 잠깐 귀국한 미국인 이혼남이 전처와 마주치는 이야기, 세번째는 알콜중독자 아내를 가진 젊은 가장의 이야기이다. 다들 개인에게는 나름 엄청난 시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멀리서 보기엔 다소 드라마틱함이 부족한 일상적 딜레마인 것이 사실이다. *마침 세번째 수록작의 제목은 'A Domestic Dilemma'이다* 그렇다고 매컬러스가 상황이 주는 드라마틱함을 넘어 개인의 내면, 추상적인 주제 혹은 미감을 깊게 파고드는 작가인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우울하고 한심한 인생들의 우울하고 한심한 위기와 고뇌와 일상, 감정들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서술한다. 

 

나에겐 1세계인들이 쓴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다소 고역으로 느껴진다. 이런 저어감에는 우스갯거리로 First World Problem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의 호들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예전에 <내 생명 앗아가주오> 독후감을 쓰면서 한번 농담처럼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괴물같은 사회나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PTSD를 앓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대체로 흥미를 잃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개인들의 하찮은 절망에 끈질긴 관심을 쏟는 매컬러스는 꽤 견딜만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 작가의 끈질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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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에 대해 쓰기 전에 우선 이 책을 읽게된 내력에 대해 잡담하고 싶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빌린 책이다. 하지만 나도 굳이 돌려줄 생각이 없고, 책을 빌려준 사람도 굳이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라는 이름은 아마 고1때 읽은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처음 접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 하여튼 유의미하게 레비스트로스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그때 처음 읽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대철학으로 갈수록 책이 점점 지루하게 느껴지던 중,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챕터를 재밌게 읽었다. 이런 기호에는 아마 평소 역사학을 좋아하던 취향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완전하게 추상의 영역에서 사고하는 것 보다는, 결국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어쨌든 인간 사회나 언어라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쪽이 나에게는 재밌게 느껴졌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그가 아메리카대륙의 원시사회를 주로 여행하고 연구한 학자였다는 점이 매우 내 흥미를 끌었다. 이는 내가 조셉 캠벨을 읽고 (이 경우 북미이긴 하지만)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한 환상을 어느정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고2 겨울방학 무렵, 당시 친했던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갈 일이 있었다. 친구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고전(특히 한길그레이트북스의 그것들...)이 쌓여있었는데, 마침 그때 <슬픈 열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친구에게 평소에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고, 친구는 그냥 엄마가 서울대 추천 중고생을 위한 인문도서 100선인지 뭐시기를 사온 것이라 답했다. 이쯤에서 친구를 변호하자면 걔는 결국 철학과에 진학했고, 전공만 철학일 뿐 사실은 철학을 싫어하는 나에 비하면 아주 진지한 철학도가 되었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빌렸다. 

 

앞으로 말할 내용을 살짝 언급 하자면, 나는 이 책을 약 1년뒤에, 입시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시점에 읽기 시작헀다. 아마 절반쯤 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몇년동안 내가 이 책을 조금이나마 읽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최근 신변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서울집에 있는 책들을 호주로 부쳤다. 그때 이 책도 언젠가는 읽을 각오로 짐에 포함했다. 그러고나서 이 책을 또 짊어지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는 둥 천신만고를 겪고나니 다른 건 다 때려치우고 이것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겠다고 남한테서 뺏어온건데 이렇게 부피만 차지하게 냅두느니 이참에 읽자는 마음이었다. 그떄부터 주말과 점심시간의 많은 부분을 이 책을 읽는데 할애하기 시작했다. 

 

이런 잡설을 왜 이렇게 길게 쓰냐면, 인간 기억의 허점과 작위성에 대한 기묘한 경험을 이 책을 읽으며 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나는 어느순간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몇년간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적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실로 사소한 조작이고 아마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자신의 기억에 미세한 조작을 가하며 살고있겠지만, 그 오류를 인지하고 알아채는 경험은 꽤 드물 것이다. 

 

이런 기억상의 오류를 인지해낸 과정도 제법 우스꽝스럽다. 책의 절반쯤 못가면 작가가 마테차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기시감이 확신이 되었다. 내가 '마테'라는 기호품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책의 이 장면이었던 것이다. 당시엔 마테차가 대중화 되기 전이었으므로 그러한 기호품의 존재가 상당히 인상 깊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마테차가 뭔지는 기억해놓고 책의 다른 모든 핵심적 부분들과 심지어는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까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이 무슨 바보같은 일인가! 역시 귀찮아도 기록을 열심히 해야한다. 그래서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지금도 귀찮음을 극복하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음.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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