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게까지 colour-blind한 책이 모던클래식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 합당한가? 더욱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진보적 어젠다와 상상력이 작품의 존재의의와 분리될 수 없는 경우, 다른 종류의 소수자성과 고통에 대한 무신경함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다른 많은 반동적인 작품들이 사면 받는 것처럼, 그것의 예술성과 훌륭함에 기대어 '클래식'의 지위를 인정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얼마나 비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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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거의 반년이 지나 2017년 6월 19일에 이 포스팅을 쓴다. 갓 읽었을 때 더 할 말이 많았겠지만 어쨌든 계획해둔 포스팅을 미루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연말연초에 옌렌커의 소설을 ebook으로 몇 권 구입해 읽었다. 옌롄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한참 전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번역/출간 됐을 때였다. 그때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고 한참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지난 몇년간 픽션을 경시하는 버릇이 생긴터라 막상 구입하진 않았다. 그러다 작년 말,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책 읽기가 힘들어지겠다 싶어 + 심심해서 ebook을 좀 많이 구매했었다. 아무래도 ebook으로 읽을거면 논픽션보다는 빨리 읽히는 픽션이 낫겠다 싶어 소설책 위주로 구매했다.   


1. <나의 아버지, 20161223~20161224>


처음 읽은 것은 <나의 아버지>였다. 작품세계를 모르는데 무작정 픽션부터 읽는 것 보다는 수필을 먼저 보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그런 선택을 했다. 작가는 문혁 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 시절 일상 이야기가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특히 학교 얘기를 할 때, 작가의 주관적 경험과 정서가 우리 부모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아무리 둘 다 가난했어도 중국의 그것이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극단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개개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체험이 가난, 기회의 박탈, 권위주의 문화, 이런 요소들에서 온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한 듯. 그렇게 엽기적이기 까지 한 빈곤과 육체노동의 서사를 무심히 읽고 있다가 아버지의 죽음 전후의 정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을 굳이 이 포스팅에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1) 스포일러임 2) 안 적어도 계속 기억할거거든~~~~ 혹시나 궁금해 할 사람이 있다면, 그 부분은 작가의 윤리적 감수성에 어느정도 확신이 들게하는 통렬한 자기고백이었다고 묘사하겠습니다.


2. <사서, 20161226~20161227>


두번째로 읽은 것은 사서였다. 별 이유는 없고, 구할 수 있는 옌롄커의 ebook 중에 이게 비평적으로 더 후한 점수를 받는 것 같았다. 이 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굳이 <물처럼 단단하게>를 구매해서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와서 쓰려니 잘 생각이 안난다... 희미하게 남은 인상을 그러모아 이야기를 해보자면 일단 작가가 무척 스타일리스트라는 인상을 받았고, 또한 비극적 사건들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스타일은 아니되 무언가를 피하고 승화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지도 않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특화된 글쓰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스타일리스트라는 점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우선 이 소설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같은 사건에 대한 네 가지 책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설정이다. 그 네가지 책들은 순차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작가의 마음대로, 이야기가 이어지게끔 발췌/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수작질(?)은 움베르트 에코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는데, 에코야 뭐 중세연구가니까 그런 설정에 대한 욕망에 뚜렷한 목적과 동기가 있다고 해도 이 작가가 왜 이런 설정을 했는지는 상당히 불가사의하다. 단순히 네 명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라면 시점을 바꿔가면서 쓰면 되는만큼 굳이 네 가지 '기록'이어야 하는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서도, 나는 꽤 재밌게 봤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고있는 많은 고전이란것들이 결국 익명의 작가들의 공로가 짜깁기 된 그런 물건들 아니겠는가. 하나의 책이란 고랫적부터 결국 많은 책들의 총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서>가 하나의 책인 게 이상할 건 없다. 더 강렬한 동기도 뭔가 있을 거 같은데, 미욱한 독자라 이 이상은 모르겠음. 


'직설적인 묘사를 하지않되 피하지도 않는다'는 평가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충분히 잔혹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고 생각해도 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여러 한국소설이나 남미문학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 자체가 개인보다는 추상적 지위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들은 음악, 작가, 종교, 아이 등으로 불리운다) 그렇기도 하고, 일상적 묘사를 하다말고 갑자기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물론 이 책 자체가 지극히 비일상적인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긴하다). 다만 그렇다고 남미문학을 평가할때 관용어구처럼 쓰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닌 거 같고.. 원래 중국어가 모호해서 그런가? 하여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스타일이었고, 그러면서도 내 취향에 맞았다.


전반적으로 (나쁜 의미에서가 아닌!) '작가가 예술가구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3. <물처럼 단단하게, 20161230~20170102>


사서를 읽고 옌롄커에 대한 궁금증이 MAX가 되어 결국 이 책도 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서보다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초기작이라 그런지 대충 이 작가 스타일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겠다 싶어 나쁘진 않았다. 사실 내용이나 스타일이 별로라 싫었다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너무 우스꽝스럽게 극혐이라 읽는 내내 '이게뭐여.... 이게 개그여 리얼이여... 이게 뭐여...'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마지막의 반전은 꽤 볼만했고, 다만 초중반을 잘 넘겨야 재밌다. 제목이 왜 <물처럼 단단하게>인지는 모르겠다. 다분히 인위적으로 통속소설의 톤을 띄고 있다. 내 생각엔 아마 이 책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프로토타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목만 보고 한 생각이다, 왜냐면 중국공산당 선전물의 언어가 <물처럼>에 등장하는 묘사들에서 엄청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안읽어서 모르겠엉~~~~~




다음에 읽고 싶은건 <딩씨 마을의 꿈>과 <풍아송>인데 안타깝게도 이 둘은 ebook이 없다. 영어권에는 이외에도 <Lenin's Kisses>, 그리고 제법 최근작으로 보이는 <The Explosion Chronicles>과 <Marrow>가 번역되어 있는데 <Marrow>가 상당히 재밌어보이므로 언젠가는 구해서 읽을 듯. 




결론: 옌롄커좋앙ㅈㅐ밋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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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ebook을 조금 사서 읽는다. 계기는 사소했다. 하루는 장편만화가 너무 읽고 싶은데 뭘 읽어야할지 생각이 안났다. 그래서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ebook을 몇 권 샀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하루, 내가 어릴때 황석영의 <손님>을 보고 왜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의 ebook을 사서 훑어봤다.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고 보니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결국 당초의 목적인 내가 받은 충격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경험으로 인해 내 안의 리미터가 하나 해제되었다나는 ebook을 사기 시작했다.


나에겐 타블렛 PC라던가 ebook 리더 같은 기기가 없으므로 노트북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읽게 된다. 이게 뭔가 싶지만서도 pdf 파일로 무언가를 읽는 것 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내 경우 pdf 리더로 뭔가를 읽어야 하는 경우 텍스트가 아주 재밌지 않은 이상은 2, 3페이지 이상을 견디기가 힘든데 (그래서 보통 인쇄를 한다), 교보문고 SAM이건 크레마건 간에 ebook 전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경우엔 긴 글도 읽을만 했다. 


그러다 며칠 전 알라딘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는데, 페미니즘 도서 ebook을 얼마 이상 구매하면 에코백을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그 에코백이 괜찮아 보여서 ebook 몇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고 또 며칠 뒤 과제를 시작하기 전 스스로를 위무할 목적으로 장바구니의 책을 몇 권 샀다. 근데 ebook 포함 2만원 이상 결제하면 에코백을 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3만원 이상이었다. 결제는 이미 해버린 후였다. 호곡곡고구고고고곡! 빡치지만 어쨌든 책을 산 건 산 것이니 파일을 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SF는 내게 여러모로 생소한 장르다. 나는 언제나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했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표지가 너덜너덜 떨어질 때까지 읽어댔고, 도서관에서 아무 민속학 책이나 집어 곧잘 읽었으며,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동양의 고대사에 끌리곤 했다. 신화나 전설 따위를 읽고 있으면 인간의 상상력이라는게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보편성을 확인 받는 것 같아 안심도 됐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에 대한 기대'는 없는 편이다. 나에게 스포일러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건 거기서 거기고 중요한 건 전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에게서 몇 마디 정보를 얻는다고 그게 이야기를 겪는 나의 경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어쨌든 나는 특정한 형식의 이야기들이 다른 형식의 이야기들보다 매력적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각기 다른 정서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할 말이 있다). 


각설하고, 알라딘 이벤트라는 사소한 계기가 없었다면 SF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분위기를 타서 SF 도서를 몇 권 더 주문하기까지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서사라는 것에 대해 큰 기대가 없고 또한 작중 묘사가 엄청 강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장르적 쾌감이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애초에 내가 장르적 쾌감이라는 것을 얻기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이런 스스로의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갖고있는 어떤 태도에 꽤 매력을 느꼈다. 물질적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묘사, 휴머니즘 같은 것들. 소설이건 영화건 뭐건 간에, 현대의 매체들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과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적 수준이 세계에 대한 다층적인 묘사를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나갈 수 있게 하는 데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예를 들어보자. 단순히 옛날 이야기에서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이 '지상낙원', '천국', '내세', 정도로 등장했다면 작중 등장하는 두 개의 다른 세상(둘 다 나름대로 인류가 열망해온 '지상낙원'들이라고 볼 수 있는)은 모두 복잡한 결을 갖고 있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에 설득력이 있었다. 


더욱 맘에 드는 점을 꼽자면 단순히 (너무나 거장인) 작가가 입체적인 세상을 직조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국 작가가 어떤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건 문학 속에서건 너무 비대하고 복잡해진 이 시대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도 선택은 틀릴 수 있고 나의 선의와 상관 없이 책임은 돌아온다. 선택 그 자체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꼭 해야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선택'은 멍청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혹은 작가는, 선택을 한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물리학자인 주인공의 이론이 아주 모호한 형태로만 제시되는 것에 대해 다소 답답함을 느꼈는데 어차피 과학적으로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라 이 부분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수포자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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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는 친절함이 과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불친절한 책이었다. 화자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은 무척 쉽다. 매우 통속적이다.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역사적 맥락이 어떤 형태로 제시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책은 불친절하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들을 읽으며 칠레 현대사의 큰 줄기를 대강 배우는 일은 가능하지만 마스트레타의 소설들을 읽으며 멕시코 현대사를 배우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물론 어디까지나 스타일이 그렇다는거지 그럼으로 인해서 이 소설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배경지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꽤 재밌게 읽었다. 


중남미문학에 통달은 커녕 특별한 애호도 없다. 사실 문학에 대한 애호 자체가 그다지 없다. 몇년전부터 소설을 읽을때마다 내가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러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내게 소설에 대한 취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동유럽 출신이거나 중남미 출신이면 어느정도 신뢰를 하고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고나면 대체로 만족하곤 한다.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PTSD를 앓게 된 사람들이 쓴 것만 같은 소설들이 좋다. 그렇지 않은 경우 대체로 시시하다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남미소설에 대한 내 기대에 별로 어긋나지 않았다. 


내용에 대해 쓰고싶지는 않다. 사실 이 소설엔 그다지 내용이랄 것도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부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 속의 이야기와 닮은 부분들이 있다. 그러고보면 내가 중남미소설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경로가 내 주변의 그것들과 비슷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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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빨리 읽힌다. 이 책이 무척 훌륭하고 흥미진진하고 가독성이 있어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글이 저널리스트 스타일로 쓰였다. 물론 그런 스타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어쩐지 조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길게 논의되었어야 할 주제들이 너무 짧게 다뤄진다는 느낌이 든다.


- '사실'에 대한 기술 이외에는 별 것 없다. 나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차라리 위키피디아를 읽는 게 낫다고 느낀다.


- 어떤 화두(e.g. 철학자의 직업윤리?)는 매력적이긴 하다. 그러나 결론은 이상하다.


-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다시' 옹호하게 된 부분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비열하게 쓰여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실제로 혐오스러운데가 있는 일이긴 하지만.


- '왜' 그들의 철학이 아직도 논의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저자는 그들이 원래부터 기득권이었고 가해자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


- 어쨌든 크게 불쾌한 점도 없고 난해한 부분도 없다. 심심풀이로 읽기에는 매우 좋다.



추가 코멘트

*한국행 비행기에서 읽었다. 나는 그날 매우 운이 좋아 비즈니스석을 탈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편했던만큼 그때 조금 더 괜찮은 책을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201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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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쥘 미슐레의 <마녀>를 직간접적으로 인용하는 부분들

2. 1789년의 혁명에 대한 언급들




추가코멘트


이 메모가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라와있다는 사실을 오늘(20160902) 깨달았다. 2야 뭐 당연한 부분이니 상관 없지만 1은 어떤 부분에서 그런 확신을 가졌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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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바리

저자
윤선자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4-06-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웃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와 문을 부수고 오물을 던진다샤리바리...
가격비교

2014년 7월 14일에 온라인 교보문고에서 서울집으로 주문하였다. 나의 육신은 물론 다른 나라에 있으므로 당장 읽을 생각은 아니었고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내 방에 쌓아놓고 겨울방학에 읽을 생각이었다. 허나 아버지께서 소포를 보낼 때 책을 몇 권 정도는 보내주실 수 있다기에 이 책과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를 우선 부탁하였다. 후자는 그 책의 성격상 너무 컴팩트했기에 상대적으로 이쪽이 굉장히 컨텐츠가 풍부한 느낌이었고, 더불어 흥미진진했다. 초반부는 전에 어쩌다 줏어 읽은 저자의 동일 주제를 다룬 논문과 내용이 다소 겹쳐 심드렁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모르는 이야기가 계속 튀어나와서 동기부여가 되었다.

사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Frederic Maitland의 'A Sketch of Legal History'인데 굳이 이 책을 먼저 포스팅해야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1) 일단 가장 최근에 완독한 책이며 2) 최근에 읽고있는 여러가지 책들과 여러모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3)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최근 독서의 그물에서 그나마 중간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3)에 관해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한 권의 책이 마치 블로그 포스팅처럼 태그를 갖고있다고 생각 했을 때 (e.g. 곰, 샤를마뉴 대제, 미시사, 이미지, 민속학, 민중, 농촌, 숲), 내 최근의 독서에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겹치는 태그가 제일 많다는 것이다.

3)에 관해 가장 길게 설명한 것은 한 마디로 그것이야말로 이 포스팅을 쓰게 하는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동기라는 말이다. 허나 나는 지금 책장정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지금 이 포스트를 쓰며 너무 괴로운 딜레마에 빠져있다. 왜냐면 하드커버에 꽤 두꺼운 그 책을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넣었고, 다시 꺼내기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 책 지옥이었던 방을 큰 맘 먹고 정리했는데 그 시스템을 허물기가 싫어.. 귀찮고 두려워.. 지금 내가 살고있는 자취방에 책장이라곤 두 칸짜리 작은 책장 뿐인데 이 책장에 지난 4학기 동안(나는 중간에 한 번 휴학을 했다)의 대학 교재와 오고가며 산 책들과 도서관에서 빌려온 15 권의 책들이 절묘하게 배치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비슷한 태그를 가진 다른 책들에 관한 포스팅에서 하고, 다음에 엄마 집에 갈때 책을 좀 갖다놔야겠다는 의미 없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이 책에 관한 유의미한 이야기가 있을까 낚여서 들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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