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3 이병률, <찬란>

Poems 2014. 12. 20. 01:35

 


찬란

저자
이병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0-02-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바닥없는 슬픔을 응시하는 깊고 담박한 시선 서서히 차올라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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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자상한 시간>

 

의자가 앉으려 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서로 아프게 하여

스스로 낫기도 하겠다는데

나는 한사코 혼자 앓겠다는 사람 옆에 있다

 

의자는 의자에 앉으려 애쓰고 있지만

꽃과 이 사람은

무엇을 애써 누르려 한 적도

살겠다고 애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어둠이 소금처럼 짠 밤에

병이란 것과

병이 아닌 것을 아는 시간이 뜨겁게 피었다

의자를 의자에 앉힐 수 없어

풀과 나무들과

공기들의 땀 냄새를

마시고 녹이는 사이

 

그 바깥은

죽을 것처럼 맞춰진 시간들이

다시 죽을 것처럼 어긋나고 있었다

 

까치야

소용없단다

이 밤에 아무리 울어도

기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기억의 우주>

 

고개를 든 것뿐인데

보면 안 되는 거울을 본 것일까

 

고통스레 관계를 맺은 기억들,

기억의 매혹들이

마지막인 것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쓰거운 것이 돼버린 파문들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끝내버리자는 것일까

 

하나의 지구를 녹이고

또 하나의 지구를 바꾸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하지 말라는 듯

우주는 새들을 풀어놓았다

무엇으로 다시 천지를 물들일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듯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우주를

쌓이고 샇이는 외부의 내부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몰고 와서는

안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를 보면 어두워지는

달을 보면 환해지는 기억들은

왜 적막하게 떠돌지 못하고

우주에 스미는 것일까

 

 

 

<입김>

 

가볍게 입김으로 용서해다오

발정 난 종아리에

가볍게 입김을 부어다오

 

잘못과 방랑과

아무것에나 아무한테나 아니다라고 말 뱉은

내 사막을 끝나게 해다오

 

저녁이 오고 새들이 세상을 지우려 해도

거짓한 내 능청과 황폐를

매 맞게 해다오

 

입김으로 감자를 싹 나게 해다오

입김으로 살찌게 해다오

 

나 죽어서도 한 오십 년 입김을 뱉게 해다오

 

그리해다오

 

내장이 외워대는 잡설들을

감히 손 뻗었던 낙원들을

모두 문 닫게 해다오

 

소슬히 빈집의 장판을 들추는 일

그 빈집 습기로 허물어지는데도

광휘를 보겠다고 지켜 서 있는 나를 배웅해다오

 

넘어서다오

 

가볍게 입김으로

가볍게 입김으로

나를 파다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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