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단어

저자
유희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06-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짐짓, 말하지 못했던 우리의 감정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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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었다던 작약>


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는 것이다 그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나는 당신보다 아름답다>


여자는 두 팔로 남자의 허리를 감고
남자의 가슴에 울음을 바르고 있다
등이 점점 둥글게 말린다 그대로
서로의 몸속으로 들어설 것처럼
얼굴을 핥아가며 기록하는
슬픔의 지형과 습도와 기온

잃어버린 축축한 열쇠를 들고,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을 열며
들어가다 멈춰 선 자세로
서서히 사라지는 어떤 계절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아껴가며 울었다
신발 끈 묶듯 모든 이별을 경험했으니
방목하던 인류애를 모두 불러
일부는 팔아먹고 병든 것들은
풀어주었다 그 계절을 이렇게 적는다
개인의 역사란 뒷골목에 묻은
울음소리 같은 것 내 주변에는 늘
비가 내렸고 장엄한 풍경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이든 되기를 바랐다
비가 오는 밤에는 꼭 누군가
등 뒤에 서 있는 기분 사람은
누구나 등을 키우고
나는 나를 받아내느라 내 손을 다 썼다

지금, 남자가 울어버린다 등만 남긴
서투른 연애를 경청하며 조금씩
녹아내리는 사람이 있다 곁으로
구름이 모이고 달무리 진다


 

 

<우산의 과정>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검은 물로 태어나는 것 혹은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방법 혹은 혼자서 걸어가는 일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나뿐,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나는 긴 우산을 들고 있었고 하늘은 우울한 색으로 빛났다. 인부들은 동시에 신음을 쏟았다. 휘청이는 구덩이. 그러나 죽은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날의 색은 기억나지 않는다.
또 한 번 불붙은 것은 우산이었다 토요일이었고 나는 침착하게 걸었다 빠른 속도로 차들이 미쳐가고 웅덩이마다 가득한 멍이 넘처나 토할 수밖에는
그러니 어떻게 우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길거나 짧고 접거나 펼쳐진 채, 기억과 함께 동시에 불어나는 존재를
어떤 신문은 구멍 난 얼굴의 명단을 속보로 내보내었다 모두들 경악했으나 떨어지는 방울 하나 없이도 아무 일 없었던 그날
아침, 내가 밟았던 웅덩이는 길고 좁았다. 나는 그런 눈을 가진 이를 한 명 알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나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던 사람 왜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나는 아직도 그녀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여자의 머리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내리던 검고 가느다란 실핀 그러나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자 모든 방향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태어나는 것은 죽어가는 일일까 왜, 흐르지 않고는 미칠 수밖에 없는가
나는 매혹이 들어 올린 가벼운 천장을 보고 있다 잡아당겨 팽팽해진 이름 아래서 다행과 만족이 찾아오는 것인데,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쓰며 당황하거나 방황하는 법이다 이름은 병을 앓은 적 없다 나는 그것의 뒤를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길고 가는 뼈 그러니,
촛불같이, 젖은 신부가 지나가던 때도 있었다. 우산 아래서 그는 나를 지켜보았다. 가벼운 풍경이어도 좋았다. 동전처럼 가볍고 반짝이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걸한 그러나 목숨은 넣어둔 약 봉지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넣어둘 곳이 필요한 것이므로.
이것은 나의 오랜 철학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오래오래 이야기해왔고, 또 오래오래 이야기할 것이지만, 우산에 이름을 붙이는 미친 남자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예뻐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더라도 나는 그것을 그리고 그것과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쓰디쓴 추억일지라도.

 


 


<내일, 내일>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
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
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生前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
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더 갈 수 없는 오늘을 편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손
끝으로 당신을 둘러싼 것들만 더듬는다 말을 하기 직
전의 입술은 다룰 줄 모르는 악기 같은 것 마주 앉은
당신에게 풀려나간, 돌아오지 않는 고요를 쥐여 주고
싶어서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
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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