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저자
이성복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00-03-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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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5>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0>

 

센 강변의 배들, 물에 비친 배 그림자 순간마다 달라지고 웬 마로니에는 그렇게 많은 꽃燈을 세우는지, 그 꽃燈 뒤에 무엇이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고 싶지만 무서움은 다만 내게 있고 흐르는 노래는 옛날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 한참 걷다보면 꺼멓게 탄 여학생 시체 둘이 나란히 걸어온다 연극일 뿐이야, 다짐하지만 언제 나는 무대 밖에 있었던가 生死는 大事요 夢中生死라더니 역시 꿈은 서럽고 삶은 폭력적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나방이 한 마리 벽에 붙어 힘을 못 쓰네 방바닥으로 머리를 향하고 수직으로 부터 숨 떨어지기를 기다리네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갔다 온 사이 벽에 나방이가 없네 그 몸뚱이 데불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벽에도 방바닥에도

나방이는 없네 아직 죽음은 수직으로 오지 않았네 잘 살펴보면 벽과 책꽂이 사이 어두운 구석에서 제 몸집만큼 작고

노란 가루가 묻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아라, 슬프지 않아라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길가에 서 있고 그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보는 것이다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살 수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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