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심보선의 팬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쯤 한겨레21에서 연재되던 '시 읽어주는 남자'라는 칼럼이 있었다. 나는 그 지면을 통해 심보선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자기애가 지나친 고등학생이었다. 그 시절에 트위터, 혹은 지금 형태의 페이스북 (그땐 페이스북에 좀처럼 긴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같은 게 있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지금도 그 기질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 못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엄청난 드라마퀸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 시절의 나를 회상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어느정도 과장해서 하는 이야기다. 나는 자의식과잉이라는 점 빼면 크게 표준에서 벗어나는 친구는 아니었다. 시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시절에 읽기 시작한 저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솔직히 나는 아직도 심보선을 좋아한다는 게 다소 길티플레져로 느껴지고, 민망하다. 

그런 설레면서도 찔리는 마음으로 그의 (아마도) 세번째 시집을 샀다. 

적잖이 놀랐다.  


(여기까지가 2017년 9월 9일의 내 감상이라고, 2018년 5월 9일에 적는다)


2018년 5월 9일에 이 글을 이어 쓰자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다고 일단 변명을 해둔다. 

심보선의 테마가 많이 변했다. 물론 전작들과의 연속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 주가 된 거시적 주제들, 이를테면 용산 참사, 등은 전작들에선 모호하고 주변적으로 제시되곤 했다. 이를테면 <인중을 긁적거리며>에서 그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방식을 보라. 아마 운동권이었을 그들은 그들의 행위 자체와는 분리된 채 서정시(혹은 연애시)의 일부로 등장한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의 스타일은 확실히 다르다. 시어도 훨씬 리얼리스틱해졌을 뿐 아니라 사건들은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그 외에 할 말이 많지는 않다. 나는 이 시집을 한번 밖에 읽지 않았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와 <눈앞에 없는 사람>을 각각 서른번씩은 족히 읽었을 나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시집을 덜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덜 집착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만약 심보선이 비슷한 시를 계속 쓰고 있었다면 나는 고등학생때의 자아를 버리듯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심보선을 부정했을 것이다. 

안심하고 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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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저자
이성복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00-03-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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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5>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0>

 

센 강변의 배들, 물에 비친 배 그림자 순간마다 달라지고 웬 마로니에는 그렇게 많은 꽃燈을 세우는지, 그 꽃燈 뒤에 무엇이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고 싶지만 무서움은 다만 내게 있고 흐르는 노래는 옛날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 한참 걷다보면 꺼멓게 탄 여학생 시체 둘이 나란히 걸어온다 연극일 뿐이야, 다짐하지만 언제 나는 무대 밖에 있었던가 生死는 大事요 夢中生死라더니 역시 꿈은 서럽고 삶은 폭력적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나방이 한 마리 벽에 붙어 힘을 못 쓰네 방바닥으로 머리를 향하고 수직으로 부터 숨 떨어지기를 기다리네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갔다 온 사이 벽에 나방이가 없네 그 몸뚱이 데불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벽에도 방바닥에도

나방이는 없네 아직 죽음은 수직으로 오지 않았네 잘 살펴보면 벽과 책꽂이 사이 어두운 구석에서 제 몸집만큼 작고

노란 가루가 묻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아라, 슬프지 않아라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길가에 서 있고 그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보는 것이다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살 수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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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나의 세컨드는

저자
김경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6-03-3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망록이 당선되며 등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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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

 

날 좀더 과묵하게 묘사해다오 슬픔이여

무모함이
파멸이 서리지 않은 가슴
그 어떤 진실로
감당하랴

강렬하되 고요한 불길을 나 깨우쳤던가

형광빛 옷자락,
신발 물 붓는 나비들 가득한 일생에

검정 윤곽 너무 많이 그려넣고
탁자 위 이마 잘린 머리통에 연필꽃을 꽂고

일부러 폐 끼칠 마음은 아니었으니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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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저자
유희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06-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짐짓, 말하지 못했던 우리의 감정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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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었다던 작약>


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는 것이다 그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나는 당신보다 아름답다>


여자는 두 팔로 남자의 허리를 감고
남자의 가슴에 울음을 바르고 있다
등이 점점 둥글게 말린다 그대로
서로의 몸속으로 들어설 것처럼
얼굴을 핥아가며 기록하는
슬픔의 지형과 습도와 기온

잃어버린 축축한 열쇠를 들고,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을 열며
들어가다 멈춰 선 자세로
서서히 사라지는 어떤 계절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아껴가며 울었다
신발 끈 묶듯 모든 이별을 경험했으니
방목하던 인류애를 모두 불러
일부는 팔아먹고 병든 것들은
풀어주었다 그 계절을 이렇게 적는다
개인의 역사란 뒷골목에 묻은
울음소리 같은 것 내 주변에는 늘
비가 내렸고 장엄한 풍경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이든 되기를 바랐다
비가 오는 밤에는 꼭 누군가
등 뒤에 서 있는 기분 사람은
누구나 등을 키우고
나는 나를 받아내느라 내 손을 다 썼다

지금, 남자가 울어버린다 등만 남긴
서투른 연애를 경청하며 조금씩
녹아내리는 사람이 있다 곁으로
구름이 모이고 달무리 진다


 

 

<우산의 과정>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검은 물로 태어나는 것 혹은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방법 혹은 혼자서 걸어가는 일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나뿐,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나는 긴 우산을 들고 있었고 하늘은 우울한 색으로 빛났다. 인부들은 동시에 신음을 쏟았다. 휘청이는 구덩이. 그러나 죽은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날의 색은 기억나지 않는다.
또 한 번 불붙은 것은 우산이었다 토요일이었고 나는 침착하게 걸었다 빠른 속도로 차들이 미쳐가고 웅덩이마다 가득한 멍이 넘처나 토할 수밖에는
그러니 어떻게 우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길거나 짧고 접거나 펼쳐진 채, 기억과 함께 동시에 불어나는 존재를
어떤 신문은 구멍 난 얼굴의 명단을 속보로 내보내었다 모두들 경악했으나 떨어지는 방울 하나 없이도 아무 일 없었던 그날
아침, 내가 밟았던 웅덩이는 길고 좁았다. 나는 그런 눈을 가진 이를 한 명 알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나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던 사람 왜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나는 아직도 그녀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여자의 머리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내리던 검고 가느다란 실핀 그러나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자 모든 방향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태어나는 것은 죽어가는 일일까 왜, 흐르지 않고는 미칠 수밖에 없는가
나는 매혹이 들어 올린 가벼운 천장을 보고 있다 잡아당겨 팽팽해진 이름 아래서 다행과 만족이 찾아오는 것인데,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쓰며 당황하거나 방황하는 법이다 이름은 병을 앓은 적 없다 나는 그것의 뒤를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길고 가는 뼈 그러니,
촛불같이, 젖은 신부가 지나가던 때도 있었다. 우산 아래서 그는 나를 지켜보았다. 가벼운 풍경이어도 좋았다. 동전처럼 가볍고 반짝이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걸한 그러나 목숨은 넣어둔 약 봉지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넣어둘 곳이 필요한 것이므로.
이것은 나의 오랜 철학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오래오래 이야기해왔고, 또 오래오래 이야기할 것이지만, 우산에 이름을 붙이는 미친 남자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예뻐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더라도 나는 그것을 그리고 그것과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쓰디쓴 추억일지라도.

 


 


<내일, 내일>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
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
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生前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
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더 갈 수 없는 오늘을 편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손
끝으로 당신을 둘러싼 것들만 더듬는다 말을 하기 직
전의 입술은 다룰 줄 모르는 악기 같은 것 마주 앉은
당신에게 풀려나간, 돌아오지 않는 고요를 쥐여 주고
싶어서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
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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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이병률, <찬란>

Poems 2014. 12. 20. 01:35

 


찬란

저자
이병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0-02-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바닥없는 슬픔을 응시하는 깊고 담박한 시선 서서히 차올라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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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자상한 시간>

 

의자가 앉으려 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서로 아프게 하여

스스로 낫기도 하겠다는데

나는 한사코 혼자 앓겠다는 사람 옆에 있다

 

의자는 의자에 앉으려 애쓰고 있지만

꽃과 이 사람은

무엇을 애써 누르려 한 적도

살겠다고 애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어둠이 소금처럼 짠 밤에

병이란 것과

병이 아닌 것을 아는 시간이 뜨겁게 피었다

의자를 의자에 앉힐 수 없어

풀과 나무들과

공기들의 땀 냄새를

마시고 녹이는 사이

 

그 바깥은

죽을 것처럼 맞춰진 시간들이

다시 죽을 것처럼 어긋나고 있었다

 

까치야

소용없단다

이 밤에 아무리 울어도

기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기억의 우주>

 

고개를 든 것뿐인데

보면 안 되는 거울을 본 것일까

 

고통스레 관계를 맺은 기억들,

기억의 매혹들이

마지막인 것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쓰거운 것이 돼버린 파문들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끝내버리자는 것일까

 

하나의 지구를 녹이고

또 하나의 지구를 바꾸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하지 말라는 듯

우주는 새들을 풀어놓았다

무엇으로 다시 천지를 물들일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듯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우주를

쌓이고 샇이는 외부의 내부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몰고 와서는

안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를 보면 어두워지는

달을 보면 환해지는 기억들은

왜 적막하게 떠돌지 못하고

우주에 스미는 것일까

 

 

 

<입김>

 

가볍게 입김으로 용서해다오

발정 난 종아리에

가볍게 입김을 부어다오

 

잘못과 방랑과

아무것에나 아무한테나 아니다라고 말 뱉은

내 사막을 끝나게 해다오

 

저녁이 오고 새들이 세상을 지우려 해도

거짓한 내 능청과 황폐를

매 맞게 해다오

 

입김으로 감자를 싹 나게 해다오

입김으로 살찌게 해다오

 

나 죽어서도 한 오십 년 입김을 뱉게 해다오

 

그리해다오

 

내장이 외워대는 잡설들을

감히 손 뻗었던 낙원들을

모두 문 닫게 해다오

 

소슬히 빈집의 장판을 들추는 일

그 빈집 습기로 허물어지는데도

광휘를 보겠다고 지켜 서 있는 나를 배웅해다오

 

넘어서다오

 

가볍게 입김으로

가볍게 입김으로

나를 파다오

Posted by 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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